제 8과 이사악과 그의 두 아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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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과 이사악과 그의 두 아들 이야기 (25,19-30,43)

8과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의 역사로 시작합니다.
이사악의 나이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이사악은 라반의 누이인 레베카와 혼인합니다. 하지만 시어머니 사라가 그러했던 것 처럼 레베카도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지요. 이사악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레베카와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후손을 허락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이사악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 부부는 아이를 얻게 됩니다.

그냥 성서를 읽다 보면 ‘아! 레베카가 아이를 낳지 못하여 이사악이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이를 들어주셨구나.’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사악이 마흔에 혼인을 하고 쌍둥이를 낳은 때가 예순이었다는 사실(25,26)은 이사악의 오랜 간절한 기도의 순간들과 더불어 이십여 년에 이르는 인고의 시간들을 되새겨 볼 수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 35장까지의 내용은 언뜻 보면 마치 이사악의 역사(25,19)를 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사악에서 시작해서 이사악(35,29)으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들은 사실 야곱의 삶을 그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사악의 삶을 그 배경으로 해서 야곱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이야기가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로 이어지는 수직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가족 이야기라면, 이사악으로 시작되는 야곱의 이야기는 형제와 형제들 사이의 갈등, 장인과 사위의 갈등 그리고 부인들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수평적 관계의 갈등이 그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삶의 모습처럼 크고 작은 갈등들이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며 이끌어 가시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주님께 청원의 기도를 통해 선물로 주어진 아이, 그런데 이 아기는 사실 한 아이가 아니라 쌍둥이였습니다. 이 쌍둥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격하게 서로 부딪히지요. 성서는 이 ‘부딪힘’의 단어를 일반적인 ‘부딪힘’을 넘어서는 ‘격렬하게 서로 부딪히며 싸우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단어를 배열함으로써, 이 서로간의 움직임이 일상적으로 쌍둥이들이 함께 있음으로 인해 일어나는 태동이 아님을 설명합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형제들간에 일어날 삶의 순간들을 예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어머니 레베카에게도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레베카는 이 의문을 주님 앞에 나아가 문의를 드리며 스스로 해결해 보려 합니다. 이 역시 일반적인 기도나 문의는 아니었지요. 마치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레베카는 주님께 문의를 드리러 갑니다. 당대의 시대상이나 상식대로라면, 이는 아이의 임신을 청했던 이사악이 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어머니 레베카가 직접 문의를 드립니다. ‘주님께 간다’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이 문의는 기도와 질문을 포함하여 ‘제의적 성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앞으로 이 두 형제들에 게 펼쳐질 삶에 있어서 레베카가 담당하게 될 몫과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25,23)

하느님의 말씀은 사실 축복의 생명을 잉태한 어머니가 듣기에 유쾌한 설명은 아닙니다. 자신이 출산하게 될 형제들이 조그만 부족도 아니고, 민족들을 이룰 것이라는 예언은 분명 축복의 이야기이지만, 이 둘이 결국에는 서로 갈라질 것이라는 말씀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여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이야기는 그리 기쁘게 받아들 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대를 잇는 다는 것은 첫째가 할 일입니다. 물론 성조사에 있어서 대를 잇는 것이 장자 즉, 첫째 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이스마엘-이사악, 에사우-야곱, 11아들과 요셉), 쌍둥이라는 것을 감안 한다고 할지라도 형이 동생을 섬긴다는 것은 형제들 간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들과 갈등들을 이미 드러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어머니 레베카의 입장에서는 두 아들 모두가 소중한 자신의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동생인 야곱이었지요. 성서는 하느님께서 왜 야곱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이 선택에서 중요한 점은 하느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다고 해서, 오직 야곱만을 축복하시고, 야곱과만 함께 하시지는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야곱이 대를 이을 것이기에 에사오를 버리시거나 외면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겠습니다. 이미 이사악과 이스마엘의 예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택 받지 못했던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하나의 민족을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그 모습처럼 하느님께서는 에사우를 통해서도 하나의 민족을 일으키실 것이고, 이 두 민족을 다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 문제 앞에서 많은 학자들은 원인론적으로 설명하곤 합니다.
즉, 성서가 최종 편집 될 때의 현실인 두 형제에게서 기원한 민족들 사이의 다툼과 갈등 앞에서, 그 원인은 하느님께서 이미 그 탄생의 때에서부터 이를 준비하시고 계셨다라고 설명 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을 야곱의 후손들이라고 한다면 에사오의 후손들은 에돔 민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과 에돔 민족은 서로 이웃하고 있는 민족이었기에 아무래도 서로 자주 부딪히게 되었고, 다윗 시대와 솔로몬 이후의 왕국의 분열(북쪽 지역은 이스라엘로 남쪽 지역은 유다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는 사건) 이후에는 남쪽의 유다가 이 에돔을 정복해서 점령해 버립니다. 상호 갈등 속 적대적 태도를 보였던 에돔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이미 에사오와 야곱에서부터 이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라고 설명하며 이 상황을 두 형제에게까지 소급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원인론적 설명은 심각하게 바라보시기 보다는 이런 관점도 있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예수님 시대에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헤롯왕이, 사실은 에돔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다는 점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레베카는 출산을 합니다. 쌍둥이 형제 중 먼저 나온 형은 태어났을 때부터 그 살갗이 붉고 온몸이 털 투성이라 그 이름을 ‘에사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사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붉은’ 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를 잠시 살펴 보겠습니다. 이 ‘붉은’ (אַדְמֹנִי) 이라는 형용사는 아담(אָדָם)과도 같은 자음 즉,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과 ‘붉다’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공동 번역에서는 ‘아담’이라는 고유 명칭으로 불렀던 이 이름이, 새 성경의 번역에서는 상황에 따라서 호칭으로서의 ‘아담’과 더불어 ‘사람’이라고도 번역된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은 또 히브리어로 땅(אֲדָמָה)에 해당되는 단어와도 그 모음만 다를 뿐 같은 자음을 공유하고도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광야의 땅 색깔은 붉은 색이지요. 즉, 아담과 땅과 에사우가 다 ‘붉다’라는 뜻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인데요, 이는 에사우가 붉콩죽을 먹게 해 달라는 요청으로 에돔(אֱדוֹ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에 까지 연결되고 이 연휴로 그 후손들 역시 에돔이라고 불리는 것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도 역시 아담과 같은 자음을 공유하며 ‘붉음’을 되새기게 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어 쌍둥이 동생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뱃속에서부터 부딪혔던 이 동생은 태어나면서 부터 형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신이 먼저 세상에 나오려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서로간에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 뒷꿈치’에 그 어원을 지니고 있으며 ‘발 뒷꿈치를 붙잡은 자’(25,26)라는 뜻과 ‘속이다’(27,36) 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갈등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지요.

형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유목민들의 삶이라 할 수 있는 천막에서 자라나게 됩니다. 아버지 ‘이사악’은 고기를 좋아하였기에 형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어머니 ‘레베카’는 하느님의 선택이었던 ‘야곱’을 사랑합니다.
사실 성조들의 역사에서 ‘편애’는 많은 갈등과 분쟁을 조장하는 요소로 등장합니다. 사냥꾼과 유목민이라는 다른 환경 속에서 각각 부모의 편애를 받고 사는 쌍둥이 형제! 이는 곧 상호간의 갈등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의 갈등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은 25장의 불콩죽 이야기 입니다.
표면적인 주제는 불 콩죽이지만, 갈등의 핵심은 ‘맏아들의 권리’입니다. 허기진 에사오가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이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죽을 끓이고 있었지요. 시장함에 다급한 형이 그 붉은 것을 좀 먹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야곱은 형의 맏아들 권리를 자신에게 팔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냉정히 이야기 해 보자면, 맏아들 권리라는 것이 판다고 팔아지는 것이 아니지요. 형제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 무형의 권리가 시장기에 붉은 콩죽 한그릇에 팔아 넘길 성격의 것도 아닙니다. 또 실지로 맏아들 권리를 샀다라고 해서, 지금 당장 각자에게 무엇이 변화되거나, 나타나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치밀하게 행동합니다. 단순히 말로서 이 권리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계약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맹세를 요구하며, 그 맹세 안에서 이 맏아들의 권리를 사게 됩니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25,32)며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25,34) 생각하는 신중하지 못한 에사우의 모습은 야곱의 치밀함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하느님의 약속과 연결되는 맏아들 권리에 대한 형제들의 생각과 모습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하는 야곱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홀히 하고 있는 에사오의 모습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요.
26장에서는 잠시 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악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아브라함의 때와 같이 이사악의 삶에서도 흉년을 맞게 되어 양식을 찾으러 이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때와는 달리 이집트가 아닌 그라르로 이사악을 인도하십니다. 당대의 상식을 따르면 흉년에는 이집트로 양식을 구하러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악은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인 그라르로 가게 됩니다. 바로 이 땅에 또다시 축복의 약속이 제시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사악과 함께 하시며 그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고, 아브라함과의 약속처럼 하느님께서는 후손과 축복의 약속을 내려 주십니다.
실지로 이사악은 그라르 땅에서 씨를 뿌려 그 수확을 백배나 얻게 됩니다. 일반적인 당시 수확률이 이십 배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 풍년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축복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드러내 주며, 이사악이 필리스타인들이 시기할 정도로 부유해 졌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축복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사악의 모습은 완성된 신앙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한 핏줄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이사악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소개합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 하느님 축복의 말씀 앞에서도 조금만 풍파가 있어도 이내 흔들릴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 하셨던 것 처럼 이사악을 보호하십니다. 이러한 속임은 이내 탄로나고 마는데 바로 이사악이 아내 레베카를 애무하고 있는 모습을 아비맥렉이 보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애무’라는 표현은 포옹, 쓰다듬음, 뽀뽀, 상호간의 장난으로 인한 웃음 정도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사실은 이사악의 이름(יִצְחָק֙)과 이 애무(צַחֵ֔ק)의 자음이 같습니다. 히브리어는 자음이 같으면 거의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이제 여기서도 이 웃음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개입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사악과 레베카가 부부라는 것을 안 아비멜렉이 이를 온 백성에게 선포하여 이사악과 레베카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땅에서의 삶이 레베카로 인해서 위협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어나는 재산으로 인해서임은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에 이사악이 자신들의 땅을 떠나줄 것을 요청합니다. 우물을 둘러싼 세 번에 걸친 필리스티아 인들과의 갈등의 모습은 이제 이사악이 더 이상 이곳에서 살기 어려워 졌음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우물은 가장 중요한 소유물 중의 하나였지요. 그런데 여기에 지속적인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소유가 될 수 없으면 흙으로 막고 메워 버리는 모습 역시 분쟁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26,15 참조)

이제 이사악은 브에르 세바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브에르 세바에 도착해서 이사악은 다시금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전의 약속을 확인해 주시고 다시금 축복해 주십니다. (26,24) 이사악은 제단을 쌓고 당신의 이름을 받들어 모십니다. 그래서 이 우물이 바로 시브아 (일곱, 맹세)가 되고, 이 연유로 이 도시의 이름이 브에르 세바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소. 그래서 우리 사이에, 곧 우리와 그대 사이에 서약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였소. 우리는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소.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에게 좋게만 대해 주었으며 그대를 평화로이 보내 주었듯이, 그대도 우리한테 해롭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오. 이제 그대는 주님께 복 받은 사람이오.” (26,28-29)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사악! 그에게 아비멜렉이 다시금 찾아 옵니다.
자신의 땅에서 이제 그만 떠나 달라고 요청 했던 아비멜렉이었고, 또 사사건건 우물 때문에 서로 갈등을 빚어 왔었던 사이이기에 우호적이기만 할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상호 평화 조약을 제안하지요. 상호 조약은 서로간의 동등한 조건에서 맺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이사악이 왕이었던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을 만큼 세력이 커지고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사악의 삶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신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지요. 이사악이 아직 아비멜렉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서로 맺을 만큼의 커다란 민족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기에 아비멜렉은 상호간의 조약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사악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축복해 주시고 그 계약을 축복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 덕분에 존중을 받고 빛나고 있는 것이지요. 이사악은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십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죄인들과는 함께 식탁의 공통체를 이루지 않으며 부정하게 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함께 먹고 마신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잔치는 계약과 화해의 잔치이며,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식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삶의 모습도 그러하듯 모든 것이 좋을 수 만은 없습니다. 에사우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히타이트 사람 여후딧과 바스맛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것이지요. 사실 아직 이 시대에 이방인들과의 혼인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때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순혈 주의는 사실 이스라엘의 남과 북의 분열과 바빌론 유배라는 역사적 사건들 이후에 더 중요하게 대두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성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사악을 이방인과 혼인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는가를 다시금 기억하게 하며, 이방인과의 혼인이 이사악과 레베케에게 근심(26,35)이 되었다는 말씀과 연결 되어, 레베카의 고향에서 친족과 혼인하게 되는 야곱과 대비되는 에사우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어느새 이사악에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사악도 자신의 때가 다가왔음을 인식(27,1-4)하고 에사우에게 마지막 삶의 축복을 전해 주려 합니다. 이 축복은 하느님과의 계약 즉, 하느님과 한 약속과 복을 전해 주는 축복이자 자신의 생명력을 전해주는 삶의 유산과 같은 축복입니다. 따라서 이는 한번 밖에 있을 수 없으며, 축복을 받은 이가 자신이 원한다 할지라도 다른 누구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축복도 아닙니다.

아버지 이사악은 이 축복을 에사우에게 전해주려 하지요. 하지만 어머니 레베카와 야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야곱이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어머니와 아들은 계략을 세웁니다. 혹시 자신이 에사우가 아닌 것을 알아채고 저주를 내리면 어떻게 하냐는 아들의 불안에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27,13) 라며 야곱을 안심시키고 계략을 세우는 레베카는 이 계획의 주도적인 인물로 제시됩니다. 사실 이사악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드는 것도, 에사우의 채취가 담겨져 있는 값진 옷을 입히는 것도, 새끼 염소의 가죽으로 손과 목둘레를 입히는 것도 레베카입니다.
마치 태속에 있었던 두 아이에 대해서 주님께 여쭈어 보았을 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답변(25,23)을 기억하고 이를 자신이 실현 시키기라도 하듯이 레베카는 주도 면밀하게 움직입니다.

이제 어머니 레베카에 이어 야곱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너무 빨리 사냥을 했다는 의심도, 에사우가 아닌 야곱의 목소리라는 의심도, 손에 털이 있는지 직접 만져보는 아버지의 시험까지도 다 통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내지요. 이 축복은 하느님 약속의 축복이요, 땅의 소출에 대한 경제적 축복이요, 뭇 겨레들의 지도자로서의 정치•사회적 축복이었습니다. 이사악은 자신의 삶을 마무리 하며 상호간의 입맞춤을 통해, 그 숨을 전함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전하는 마지막 유산과 같은 축복을 전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형의 장자권을 얻어내는 것도 모자라서, 아버지 마저 속이며 기어이 그 축복마저 빼앗으려 하는 파렴치한 야곱!! 그의 이름처럼 ‘빼앗는자’이자 ‘속이는 자’인 야곱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축복하실 수 있으신가? 이런 하느님께서 과연 정의로운 하느님이신가? 이런 부정과 욕심은 묵인하시지 않고 참된 정의를 세워주셔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기에 바로 여기에 당신의 역사하심과 섭리 역시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실 야곱이 그토록 계략을 꾸미고 집착해서 얻어낸 것은 무언가 실제적인 형태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냉정히 이야기하면 그는 이 실체가 없는 축복을 얻은 대가로 살해 위협을 느껴야 했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 머나먼 이방 땅으로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길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사실 그토록 원하는 축복을 가로챈 대가는 너무나 컸던 것이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 아닌 남에게 주어진 것을 원하고 가로챘기에, 그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한 시간도 그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축복의 가르침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하느님께서 야곱이 자신의 몫이 아닌 축복을 가로챘다고 해서 그를 바로 응징하거나 축복을 거두시지 않으셨던 바와 같이, 이 축복이 야곱이 행위에 의해 자신이 성취해 낸 것이라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주신 선물이라는 점일 것입니다.
또한 에사우가 이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에게 오직 고통과 고난과 저주에 가까운 삶이 함께 했던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이사악의 예에서도 드러나는 것 처럼 에사우에게도 큰 축복(32,7; 33,9)을 내려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점일 것입니다.
“아버지, 저에게, 저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27,34)

본문은 극적인 장면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뒤늦게 사냥을 해서 아버지께 별미를 만들어 온 에사우는 아버지께서 이미 축복을 내리셨음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 이사악 조차도 이 사실을 알고서는 몸을 떨며 깜짝 놀라게 되지요. 아버지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또 애절한 마음으로 축복을 청했던 에사우는 자신에게 주어질 축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목 놓아 웁니다. 아버지 이사악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축원의 말은 형이 아우를 섬겨야 하는 미래는 변화 될 수 없겠지만, 스스로의 힘을 기르면 그 멍애를 벗어낼 수 있으리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이는 미래의 이스라엘과 에돔 민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시대에서 부터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게 될 에돔의 운명과 유다로 부터의 해방을 맞으며 멍애를 벗어낸 에돔 민족의 역사(2열왕 8, 20)가 이사악의 입을 통해 전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울분과 한스러움에 가득 찼을 에사우에게 ‘속이는 자’라는 이름처럼 두 번이나 자신의 권리를 가로챈 동생 야곱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그의 앙심과 미움은 점점 더 켜져만 갔을 것이고 급기야 그는 자신의 동생을 죽여버리려고 합니다. 아버지 이사악은 곧 임종을 맞이할 것이고, 그 때가 바로 야곱의 세상 마지막 날이 될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에서 이미 보았던 것 처럼, 창세기 27장은 가족간에도 또 형제간에도 서로가 서로를 속일 수 있으며 또 그 미움과 증오의 마음이 얼마나 커질 수 있고, 그 갈등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본문은 우리가 가족간에 또 형제•자매 사이에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펴보며 반문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사오의 증오의 마음과 살인의 충동을 알아챈 어머니 레베카는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야곱을 피신시킵니다. 하란으로의 이 여정은 불가피한 것이고, 어머니 레베카는 형의 분노가 풀리고 야곱이 형에게 한 일을 잊을 때까지의 한시적인 피신이기를 희망(27,43-45)하지요. 하지만 야곱은 20여년이 넘는 시간을 하란에서 살아야 했고, 레베카는 다시는 야곱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이 다시금 돌아올 때에는 이미 레베카는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형 에사오의 분노와 증오가 얼마나 깊고 사무쳤었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28장의 야곱은 자신의 고향땅을 떠나서 하란으로 갑니다. 이제 이 떠남은 두 가지 성격을 가지게 되지요. 첫째는 에사오의 위협에서의 탈출이었고, 두번째는 히타이트(가나안) 사람들 즉, 이방인이 아닌 동족과 혼인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방 민족과의 혼인은 레베카 뿐만 아니라 이사악에게도 근심 (26,35)거리 였기에, 레베카의 이방인 며느리 때문에 살기가 힘들어 졌다는 호소(27,46)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이사악은 야곱의 앞길을 축복하여 줍니다. 이는 자신의 마지막 생명과 숨을 전해주는 축복과는 다르지만, 그의 앞길을 축복하며 하느님께서 자신과 아버지에게 주셨던 축복의 약속, 곧, 땅과 후손의 축복을 함께 전합니다. 이제 이사악의 상속자는 야곱으로 확증 되는 것이지요.
에사우는 야곱을 향한 아버지의 축복을 바라보며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맞지 말라는 당부 (28,6)와 부모님들이 가나안 여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다는 것을 보며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또다시 아내로 맞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축복의 길이 바뀔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긴급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떠나야만 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야곱의 피신 장면과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자신의 배우자를 찾아 나서는 야곱의 모습은 조금은 상반된 분위기를 전해 줍니다. 사실 문헌의 분류를 따라보면, 27,1-45는 야훼계 문헌이고 27,46-28,9는 사제계 문헌으로 분류 됩니다. 즉, 같은 상황에서 두 가지 전승이 있는 것이고, 서로 다른 강조점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지요.
사제계 문헌에서는 에사오의 이방인들과의 혼인에 대해 문제를 부각하며, 야곱이 같은 민족과 혼인 하였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면, 야훼계 문헌은 축복이 하느님의 의지에 의한 선택임을 강조하며, 야곱이 하란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원인적 상황에 대해 더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을 문헌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며 분석하기 보다는 상반된 어조에 대한 이해를 위해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실지로 성서의 최종 편집은 어떤 전승이 옳다가 아니라 두 부분을 다 함께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열려 있는 자세로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

파딴아람으로 길을 떠나는 야곱!
마치 쉽게 옆 동네를 가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하란으로 이 길은 장장 800여 km의 긴 길이었습니다. 이 여정에서 야곱은 처음으로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돌을 배게 삼아 잠을 청했던 야곱은 꿈을 꾸게 됩니다. 꿈에서 야곱은 하늘까지 닿아있는 층계의 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지요.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28,13-15)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축복의 약속을 해주십니다.
당대의 가장 큰 축복인 땅과 후손에 대한 축복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는 야곱이 받은 첫 번째 실재적인 축복이지요. 장자권이나 아버지의 축복은 영적인 축복이었지요. 하느님께서는 약속한 것들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야곱을 떠나시지 않겠다며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 해 주십니다. 사실 야곱은 자신이 축복을 받기에 적합한 어떠한 행동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자신이 것이 아닌 축복들을 가로챘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성조들 뿐만 아니라 구약 성서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축복의 약속들은 크게 이 세가지 축복의 약속들(땅, 후손, 함께 하심)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야곱은 바로 이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집념과 빼앗는 자, 속이는 자로서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길을 차차 걸어가게 될 것 입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28,16)

야곱은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며 이 지명을 베텔이라고 명명합니다. 원어 그대로 읽으면 벹(집) 엘(하느님의)이라고 읽을 수 있는데, 이 명칭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이지요. 사실 하느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시지요. 하지만 야곱은 이곳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즉,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이곳이 바로 ‘하느님의 집’, 곧 성전이 되게 되는 것이지요. 야곱은 자신이 베었던 돌을 기념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성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름을 부으며 하느님과의 약속을 증거하고 기념합니다. 사실 야곱의 예처럼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고 계신데 우리 자신이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형을 피해서 도망가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만난 하느님(28,21)은 고통과 아픔 중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며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주님의 모습을 되새겨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하란 가까이에 도착합니다.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은 큰 돌로 덮여져 있었지요. 이는 다른 가축들이 먹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이라기 보다는 우물의 오염을 막고, 일반적으로 지면 가까이에 위치한 우물에 동물들이나 사람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덮어놓은 돌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부인이 될 레베카를 우물가에서 만났던 것 처럼, 야곱 역시도 우물가에서 그의 배필이 될 짝을 만나게 됩니다. 이 극적인 만남이 야곱에게는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옮겨야 할 우물을 막아 놓은 돌도 혼자 힘으로 옮기게 하고, 라헬에게 입을 맞추게 하고, 목놓아 울게 하였던 것이겠지요.
라반과의 만남에서도 드러나는 것 처럼 입맞춤 자체는 당대의 친척들 간의 일반적인 친근함의 표지라고 할지라도, 라헬을 만나고 목놓아 울던 야곱의 모습은 야곱이 자신의 욕심 때문에 겪어야 했던 그간의 상황들에 대한 마음과 야곱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에게 달려가 야곱이 누구인지를 아뢰고, 라반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나와 야곱에게 입을 맞추고 집으로 맞이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라반에게 설명 합니다. 라반은 야곱을 정녕 자신의 골육이라고 외치며 환영합니다. 라반은 사실 야곱보다도 더 교활하고 치밀한 인물이었지요. 마치 사기꾼이 사기꾼에게 당하는 것 처럼, 야곱은 라반을 만나게 됩니다. 라반은 소식을 듣자마자 야곱을 만나러 달려갑니다. 부잣집에 시집 간 누이 동생의 아들이 기나긴 길을 떠나 방문을 했으니 온 마음으로 달려가 환영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라반의 성향을 고려한다면, 가지고 온 선물들과 낙타 때를 기대하며 달려갔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야곱은 있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지요. 그렇게 본다면 골육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야곱에게 남자 없이 딸들로만 양을 치며 가족들의 삶의 영위했던 라반에게 이제 좋은 일꾼이 생겼다는 환영의 외침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달여가 지난 후 라반은 야곱이 원하는 품삯을 묻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혼인하기를 원하며, 라헬을 얻는 대신 칠년 동안 일하겠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야곱이 하란에 온 것은 라반의 딸들(28,2) 가운데 한 명과 혼인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배우자는 사촌이라는 당시의 풍습에서도 능히 받아들일만한 일이기도 했지요.
레아의 눈은 생기가 없었지만(혹은 부드럽다, 별다른 매력이 없음을 지칭), 라헬은 몸매도 예쁘고 모습도 아름다웠다(직역: 예쁜 모습과 아름다운 용모)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품삯을 묻는 라반의 질문은 사실 야곱의 방문 목적과 라헬에 반해 있는 야곱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던진 질문일수도 있겠습니다.

라헬을 얻으려고 일하는 칠년이라는 시간이 며칠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어서 혼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여기서 비극이 벌어지지요. 교활한 라반의 모습이 여지 없이 드러납니다. 어찌 자신의 부인도 못 알아보고 레아와 한자리에 들 수 있는가!라고 반문해 볼 수도 있지만, 당대의 혼인 잔치는 몇 일 동안 지속되었고, 혼인 잔치에 축제의 주인공인 술이 빠질리 없습니다. 아마도 라반은 야곱을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에 레아를 밤이 되어서야 야곱에게 데려다 주었겠지요. 마치 시력을 거의 잃은 아버지를 야곱이 속였듯이 이제는 자신이 속는자가 되고 있습니다. 건장한 야곱의 노동력과 자신의 딸들의 후사까지도 책임지게 하려는 라반의 처세술은 마치 요즘 시대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다음날 야곱은 왜 자신을 속였냐며 야곱에게 따집니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럴 수가 있냐며 하소연 하지요. 라반은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했었던 것과 같은 답변을 천연덕스럽게 내어놓습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작은딸을 맏딸보다 먼저 주는 법이 없다.” (29,26)

혼인도 순서에 따라 해야 한다는 이 이야기는 사실 순서를 뒤바꾸어 장자가 되려고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던 야곱의 모습을 되새기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라반은 다시 칠년을 일해야 라헬을 얻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토록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던 야곱이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는 라헬을 얻기 위해 무모하게도 칠년이나 더 일하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떠한 조율이나 협상도 없이 라반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입니다. 사실 14년 동안 한 여인을 위하여 노예처럼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얼마나 끈기 있고 또 집요하게 노력하는 사람인지를 볼 수 있겠습니다. 야곱의 이 끈기와 집념의 모습은 라반의 교활한 처세술과 극렬한 대조를 이루며 제시되고 있습니다.

드디어 14년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행복한 단꿈과 같은 삶이 시작될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성서의 이야기들이 수많은 갈등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성조들의 삶을 보여준 것처럼, 여기서도 이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제 이 두 여인들 사이의 거대한 갈등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지요.

야곱은 당연히 라헬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29,30)
자신이 사랑해온 여인 라헬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는 상대적으로 레아에게 많은 불안감과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레아는 자신이 사랑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십니다. 당대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인 다산은 부인의 위치와 남편의 사랑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아가 네 아들을 낳는 동안에도 라헬은 아이가 전혀 없었습니다. 네 아들들의 이름들은 다 레아의 괴로움과 불안함을 드러내며, 바로 이 아들들을 보고서 야곱이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소망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반대로 라헬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였지요.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언니를 시샘하며, 자신의 몸종을 통해서라도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 버리겠어요.” (30,1) 이는 라헬의 간절한 마음과 불안함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표현일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시샘하고 남편의 사랑을 아들을 통해서 받으려 하는 이 두 여인의 고통의 모습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두 자매는 사실 둘 다 불행하였지요. 상대적으로 더 사랑 받지 못함에 동생 라헬을 끊임없이 질투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레아! 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음에도 아이를 낳아서 언니를 어떻게든 이기려고 시기하며 절규하는 라헬!
모든 것을 자신만이 차지하고 싶은 욕망과 비교 의식은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분명 엄격하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공평하기도 함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빼어난 용모와 아름다움을 가졌고,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당대의 가장 큰 축복인 아이를 낳지 못하고, 한 사람은 그 축복의 탄생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한 사람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고, 한 사람은 그 사랑에 굶주려 하며 불안해 하고 있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불안해 하며 경쟁을 일삼은 결과는 서로에게 불행함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결국 둘은 하루하루를 죽도록 싸우며 (30,8) 경쟁하고 불행의 길을 걸어 갑니다. 행복은 비교를 통한 우월이나 소유의 만족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비교는 자신이 가진것에는 우월감과 자만감으로 이끌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는 비참함과 시기•질투로 이끌 수 있지요. 감사의 마음은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며, 서로에 대한 여유와 사랑의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경쟁과 사랑을 향한 갈구는 레아와 라헬과 몸종들을 통해서 딸 디나를 포함하여 야곱의 아들들을 11명이나 탄생하는 축복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 아들들의 이름이 지닌 뜻과 그 연유들은 이 두 여인들의 심리 상태와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여인 라헬에게서도 드디어 아들이 태어납니다. 요셉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요셉이 태어나자 야곱은 자신의 장인 라반에게 이제 고향 땅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제까지가 레아와 라헬의 갈등이었다면 이제는 야곱과 라반의 갈등이 다시금 조명 받게 됩니다.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게나. 내가 점을 쳐 보니, 주님께서 자네 때문에 나에게 복을 내리셨더군.” (30,27)

요셉은 자신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내어 달라고 허락을 청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라반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일꾼이 없어지는 것일 것이고 이것이 달가울 리가 없습니다. 약속한 14년이 지났음에도 라반이 요셉을 놓아줄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라반은 또 하나의 계략을 꾸미려 합니다. 그가 점을 쳐 보니 야곱 때문에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라고 이야기 하며, 이제 정당한 삯을 주겠다며 더 일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라반의 집안이 아브라함과 같은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있지 못함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자네들 아버지의 하느님’(31,29) 이라는 하느님의 호칭이나 신들(31,30)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점괘나 여러 수호신들을 믿고 있는 라반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야곱의 부인들 역시 야곱의 영향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믿고 있지만 온전한 신앙의 길에 이르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는 삯으로 얼룩지고 점 박힌 돌연변이들만을 주면 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라반이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하지요. 라반은 줄쳐지고 점 박힌 숫염소들과 얼룩지고 점 박힌 암염소들, 흰 점이 있는 것들과 새끼 양들 가운데에서 검은 것들을 모두 가려내어 사흘 거리에 떼어 따로 놓습니다. 즉, 아무것도 야곱에게 주고 싶지 않은 라반의 계략입니다. 교활한 라반과 정직한 야곱(30,33)이 극명하게 대비되며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제는 라반의 계략에 그냥 당하고만 있을 야곱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은 황당해 보이는 야곱의 방법은 사실 오랜 기간 동안의 목자들이 양들의 습성을 관찰한 경험에 주술적 요소가 덧붙여진 방법으로 당대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공감될 수 있는 방법으로 이해해 보면 되겠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곱이 자신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복을 내리고 계심(30,30)을 체험하고 있으며, 라반의 계략과 관계 없이 하느님께서 축복을 통해서 자신의 재산을 불어나게 해주시고 축복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가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8과에 드러난 야곱은 사실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든 얻어내려고 노력하고 야비한 술수들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끈기와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그 어느 인물 보다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마주치게 되는 일반 사람들과 비슷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직 현세적 욕망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추구하였던 그가, 그 자신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서 20여년이라는 인고의 삶을 살게 되고, 그 삶의 시간을 통해서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지, 그리고 하느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기 시작하는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015-02-21 18:30:36 from 112.222.1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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