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과 야훼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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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과 야훼 이레

하느님 축복의 약속!
아브라함이 하느님께로부터 첫 부르심을 받고 고향 땅을 떠나온 이후에, 이 축복의 약속이 실현되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직 땅에 대한 당신의 약속까지 실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자손에 대한 약속이 이사악을 통해서 실현 되었습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의 기다림이었기에, 그 때가 되었다는 당신의 말씀 앞에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당신을 향한 온전한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축복의 아들 이사악과 함께 기쁨과 행복의 길만이 주어진 것 처럼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22,1-2)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살아있는 표징이자 증명이었던 이사악을 모리야 땅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전의 축복과 약속들이 모두 거부되고 무의미하게 됨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축복을 약속하신 하느님이시라면 이러시면 안 되신다고, 이러실 수는 없는 것이라고 탄원 드리게 될 말씀입니다. 참으로 잔인한 하느님의 모습이 22장의 첫 머리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찬찬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무리한 요구를 하시고 계시는가?
대체 무엇을 드러내려고 하시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은 마치 아브라함의 첫 부르심의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자신의 고향 땅을 떠나 당신과 함께 하는 삶의 여정의 첫 출발 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띄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신앙의 과업이 또 한번의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의 신실함에는 변함이 없는지 시험에 들게 하고 이를 지켜보시는 것 처럼 보입니다. 물론 시험에는 그런 성격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험을 통해 믿음의 조상이자 굳건한 신앙인 아브라함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하느님의 시험은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함께 하심, 하느님 현존의 또 다른 표현이 바로 이 ‘시험’이라는 단어로 자주 제시됩니다. 즉, 하느님의 시험은 바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 안에 머무름이요, 그 머무름 안에서 당신을 선택하는 길이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길 자체가 그러합니다. 신앙을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지속적인 시험에 놓이는 것이지요.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 안에 머무르며, 그 선택의 길이 바로 신앙인의 길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큰 위기에 놓였습니다.
성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간 것 처럼, 믿음 안에 올곶은 순명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으로 전해 줍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성서 해설서인 미드라쉬는 이 장면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을 데리고 가라.“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저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말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왜 한 아들입니까? 하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사악, 저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저는 두 아이를 다 사랑합니다.”
이제서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사악이다.” (미드라쉬, 창세기 (VAYERA), LV. 7)

유대인들의 해설서의 설명을 따라보면 순명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너의 외아들, 이사악” (22,2)이라고 세 번에 걸쳐서 명확히 지칭하고 있는 성서 본문의 표현 처럼 하느님의 시선안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지요. 아브라함은 물론 두 아들을 다 사랑하였겠지만, 21장에서도 보여지는 것처럼, 하느님의 약속과 축복 안에서 태어난 대를 이을 아들과 몸종에게서 난 아들이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말 장난을 하는 듯 하기도 하고, 하느님께 따지는 듯 하기도 한 이 대화는 사실은 그 어느 아들도 잃고 싶지 않은 아브라함의 고통과 번뇌의 마음을 잘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면 커다란 민족이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축복의 약속은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후손들에게 줄 땅 역시 취소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침묵중에 순명하며 하느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22,3)

그런데 아브라함의 행동이 좀 이상합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장작을 팬 뒤 길을 떠납니다. 하인이 있는 주인이 보통 직접 나귀에 안장을 얹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인들이 할 일입니다. 또한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패어 다 준비가 되면 나귀에 안장을 얹고 길을 떠나는 것이 맞습니다. 이 또한 아브라함이 직접 할일은 아니겠습니다.
주인이라면 하인들에게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패오게 한 뒤, 하인들이 나귀에 안장을 얹어서 출발할 준비가 되면 그때에 몸만 나서면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뒤로 미루며, 해야만 한다며 그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하고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유대 학자 Rash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행동을 아브라함의 아들을 향한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찌보면 이것이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표현일 것입니다. 믿음의 성조라 불리는 아브라함에게도 이 순명이 얼마나 어려운 순간들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22,4)

아브라함은 길을 떠나 사흘째 되는 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을 보게 됩니다. 성서 안에서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들이 중요한 의미들을 지닐 때들이 많은데, 삼이라는 숫자는 삼위 일체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삼일 이라고 하는 시간은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시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에도 삼일 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내면에서부터 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산을 봅니다. 눈을 들어 바라본다는 행위도 성서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과 연관 되거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제의적 표현으로도 자주 사용됩니다. 이는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인들은 남겨둡니다. 당연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하인들이 보기를 원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나와 이 아이는 경배하고 돌아오겠다’라고 이야기 하며 길을 떠납니다. 그 자신이 홀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아브라함이지만, 마치 함께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 않으며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는 것처럼 하인들에게 이야기 하고 이사악과 함께 산을 오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은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듭니다.
떠나올 때의 준비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시간상으로 가장 마지막에 필요한 도구들은 자신이 직접 챙깁니다. 먼저 장작으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묶은 다음가장 마지막 순간 제물을 봉헌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칼과 불이었습니다.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은 아브라함의 마음의 표현이자 그렇다 하여도 결국 순명 하여야 한다면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의 손으로 행하겠다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번제물을 사를 어린양만 빼고는 이제 모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사악이 묻습니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22,7)

참으로 가슴 아픈 장면입니다. 대답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22,8)

아브라함은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직접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이겠지만,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순명의 마음이 잘 조화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원문 그래도 직역해 보면 “나의 아들아,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 스스로 보실 것이다.”가 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사실 이중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나의 아들아, 하느님께서 스스로 보실 것이다.”와 “하느님께서 스스로 나의 아들을, 번제물로 보실 것이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성서를 번역할 때는 위의 문장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문장 자체는 두 가지의 해석이 다 열려 있는 중의적 표현이 됩니다. 즉, 듣는 이사악 입장에서도 ‘하느님께서 스스로 마련해 주시겠구나’ 라는 생각과 더불어 ‘아, 그 번제물이 내 자신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도 마지막까지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양은 바로 네가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도 됩니다. 잠시 설명드렸던 미드라쉬에서는 아예 후자로 이 문장을 해석하며, 이사악이 이를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라고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어찌되었던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더 이상 아무런 말 없이 함께 제단을 향해 걸어갑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22,9-10)

이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그 축복과 약속의 상징은 다시금 당신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처럼 그에게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느님의 축복의 약속에 대한 희망도, 커다란 민족에 대한 확증도, 더 나아가 땅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없습니다. 다시금 웃음을 잃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상황이 올것이고, 이제 그에게는 그 마지막 삶의 때를 기다릴 일만 남을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22,12)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22,17-18)

그런데 바로 이 절제 절명의 순간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 손을 대지도 해를 입히지도 말 것을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이사악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이어 새로운 커다란 축복의 약속이 이어집니다. 그에게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수많은 자손의 축복이 주어질 것이고, 이 후손들이 원수들의 성문을 즉,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사흘째 되던 날 눈을 들어 바라본 곳은 바로 아들 이사악이 죽어야 할 산이었습니다. 이는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천사의 축복의 소식을 듣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덤불에 걸린 숫 양이 보입니다. 새로운 삶의 상징이 보이는 것입니다.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아브라함의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22,14)

아브라함은 바로 그 산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고 하고, 사람들은 이를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야훼 이레’를 직역하면 ‘하느님께서 보신다’가 됩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께서 보도록 하신다’라고도 번역이 가능하지요. 하느님께서 보시고, 보도록 하셔서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숫 양은 그 전부터 덤불에 걸려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잃어야 했던 아버지에게 그 양이 보일 리 없습니다. 당신의 돌보심 안에서 이제는 보이지 않던 양이 보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마련 해 주신 것이지요.

사실 이는 우리의 삶과도 무관하여 보이지 않습니다. 똑같은 길을 걷고 있어도 보는 것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절의 변화 앞에서 그 세세한 변화들을 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어제와 같은 오늘일 뿐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도록 하셔서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것! 하느님께서 만나게 하시고, 알도록 해 주시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겠지요. 하느님 체험이 우리가 보지 못하던 부분들을 볼 수 있게 하고 변화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신앙의 길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고 보고 계신 다는 것을 그는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바로 선하신 하느님을 다시금 보게 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훼 이레’는 아브라함 신앙의 고백이자, 완성이며, ‘야훼 이레’안에서 믿음의 선조,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은 그 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또 한가지 ‘야훼 이레’를 통해서 살펴 볼 중요한 점은, 고대 근동 지방 특히 가나안의 풍습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어린 아이를 번제물로 바치는 제의적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시험은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아이를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셨거나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봉헌이 필요한 분이 아님을 드러내 줍니다. 세상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는 그러한 제물과 제사가 필요치 않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마련해 주시는 축복의 하느님, 선하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희생 제물은 동물로도 충분하며, 그 제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봉헌자의 마음 가짐과 행실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우 나호르의 자손들의 이야기(22,20-24)는 이스마엘이나 열두 지파를 이뤘던 야곱 처럼, 나호르도 완전한 숫자인 열 두명의 아들을 가졌음을 드러내며, 하느님의 축복이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그의 집안에도 널리 펼쳐 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특별히 관심을 가질 부분은 바로 브투엘에게서 레베카가 태어났다는 점(22.23)인데, 친척이자 같은 혈족인 이 레베카는 이사악의 아내이자 야곱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23장에서는 사라의 죽음과 막펠라 동굴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당대의 일반적인 관습에 의하면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그곳에 죽게 되면 묻힐 수 있는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땅의 주인이었던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묘지의 양도를 청합니다. 분위기는 매우 우호적이며,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제후’라고 표현하며 가장 좋은 곳을 거져 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제안한 동굴을 은 사백 세켈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보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우호와는 조금 거리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져 주겠다하며 내세우는 가격이 사실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를 보면 오므리 임금이 사마리아 산과 그 일대의 지역을 은 두 탈렌트 즉, 이천세켈에 구입(1열왕 16,24)하고, 예레미야 예언자는 벤야민 지방의 아나톳의 밭을 열일곱 세켈에 구입합니다. 밭에 딸려 있는 동굴의 가격으로는 터무니 없는 금액이지만, 아브라함은 묵묵히 그 금액을 지불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약속에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축복의 약속이 바로 땅이었습니다. 물론 이 동굴을 샀다고 해서 그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드디어 아브라함은 온전한 “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에프론의 밭에 있는 막펠라 동굴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는, 이 동굴에 단지 사라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25,9), 이사악(35,29), 레베카와 레아(49,31), 그리고 이집트에 있었던 야곱(50,13) 조차도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바로 이 막펠라 동굴에 묻혔다는 데에서도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신의 삶에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들 이사악의 혼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혼인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손에 대한 약속도 또 축복도 지속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늙은 종을 불러 자신의 샅(사타구니)에 넣게 하고 하느님 앞에 맹세를 하게 합니다. 우리의 정서에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이 행위는,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을 전할 때 행하는 풍습이기도 했고, 생명의 근원에 대한 맹세를 통하여 이 맹세를 반드시 지킬 것이며, 또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에게서 생명이 이어지는 축복을 포기하겠다는 의미 역시 포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민족인 가나안 족의 딸이 아니라 고향과 친족에게서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인을 데려오게 합니다. 부족적 혈통의 순수성과 또 이민족의 종교적 제의에서도 혼탁을 막는 아브라함의 명령입니다.

이 종은 우물가에서 브투엘의 딸 레베카를 만납니다.
레베카는 아주 예쁜 처녀였을 뿐만 아니라, 종에게 뿐만 아니라 낙타들에게도 물을 먹일 정도로 낯선 나그네에게 친절한 여인이었습니다. 낙타에게 물을 먹인다는 것은 그 많은 물을 다 동이로 떠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 몹시 수고로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 앞에서도 레베카는 최선을 다해서 손님을 맞습니다. 하느님께 청한 기도에 이보다 더 적합한 신부감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복 받으신 분이시여, 들어오십시오. 왜 밖에 서 계십니까? 제가 집을 치워 놓았고 낙타들을 둘 곳도 마련하였습니다.” (24,31)

레베카의 오빠 라반 역시도 이 종을 환대하며 집으로 모십니다. 하지만 여기에 재미있는 표현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라반은 ‘코걸이와 누이의 팔에 걸려 있는 팔찌를 보고’ (24,30) 이 종을 크게 환대 하였다는 것이지요. 당대의 일반적인 손님에 대한 환대의 표현 앞에 이러한 복선이 숨어 있습니다. 라반이 어떠한 사람인지, 무엇을 중시하는 사람인지 성서는 미리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후에 레베카의 아들 ‘야곱’이 그를 다시금 찾아올 때 자세히 살펴 볼 수 있겠습니다.

레베카 뿐만 아니라 레베카의 가족들은 이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받아들입니다. (24,50) 레베카는 이제 이사악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네겝 땅에 다다른 레베카는 너울로 자신의 얼굴을 가립니다. 혼인 전에 신랑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당대의 풍습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그녀를 사랑하며, 어머니를 여윈 아픔의 위로를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수를 누리며 살다가 자신의 아내 사라가 안장된 막펠라 동굴에 묻힙니다. (25,8) 하느님께서는 여종이었던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열 두 아들을 주시고, 이들 역시도 한 민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많은 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조차도 지킬 수 없는 사람이었고, 많은 약함과 실수를 하였으나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고 일생을 통해 지키려 했던 것은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살았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신 의로움 안에서 진정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는 일생에 걸쳐 노력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삶의 시간들을 통해 그는 믿음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직 ‘땅’의 축복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는 바로 자신의 수많은 후손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당신의 약속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며, 그의 후손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2014-11-27 18:17:27 from 211.206.1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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