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과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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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과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

지속적인 하느님의 약속과 실현까지의 긴장은 6과에서도 지속됩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침내 그 긴장이 현실로서 드러날 시간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다른 때 와는 달리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시는데, 주님은 마치 삼위 일체 하느님의 모습처럼 세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눈을 들어’라는 표현은 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의하거나 하느님의 현시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도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세 사람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당장 달려나가 그들 앞에 엎드려 이 손님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아브람은 세 사람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았기에 이토록 극진히 모시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을까요? 그보다는 고대의 손님 맞이의 전통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에서도 손님 맞이는 항상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교통도 발달되지 않았고 왕래도 그리 많지 않은 마을 중심의 사회 안에서, 다른 곳에서 온 손님을 극진히 예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인간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손님을 잘 모신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손님의 신변의 안전까지 책임진다는 것 역시 의미했습니다. 다른 곳을 여행한다는 것이 맹수들의 위협뿐 만 아니라, 다른 부족의 위협이 더 큰 상황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도 같습니다.
아브람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굽고 송아지를 잡아 요리하며 엉긴 젖과 우유를 함께 대접합니다. 이는 당장 준비할 수 있는 최대의 식사였을 겁니다. 식사를 하며 세 사람은 주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 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8:10)

드디어 이제 그 때가, 그 오랜 시간 기다려온 약속이 실현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은 아브라함이 아이가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웃었던 것(17:17) 처럼, 사라에게도 웃음이 나오는 일이 됩니다. (18:12)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나이 백살 된 아브라함이나 아흔 살 된 사라가 아이를 낳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고,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던 사라가 어찌 아이를 나을 수 있겠습니까? 헛웃음 내지는 비웃음이 나오는 것이 당연할 수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사라의 마음을 명확히 꽤 뚫어 보시며 당신에게는 불가능이 없음을 드러내십니다. 불가능함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셔야 하기에 이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지만 사라만이 주님께 웃었다고 핀잔을 듣습니다. 사라는 두려운 나머지 웃지 않았다고 대답했지만 냉정히 보면 사라의 대답이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었던 것이지 표정을 짓거나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사라가 억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못할 일이 없으시며 그 일이 바로 내년 이 맘 때에 이루어질 것임을 아브라함이나 사라 모두에게 확증하시고 계신다는 점일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 ‘웃음’은 앞으로 태어날 아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 ‘이사악’은 바로 ‘웃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들은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자식이 없기에 웃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약속의 실현 불가능성을 보고 이들은 웃고 맙니다. 바로 그들에게 ‘웃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아이에 관한 약속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 약속이 실현된다면 그들은 비로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 ‘웃음’의 아이에 관해서는 21장에서 이어집니다.

아브라함과 주님의 세 천사는 집을 떠나 소돔까지 내려갑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크고 강한 민족이 되게 하며 이들에게서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여 축복의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다시금 확정 해 주시며 (18:18-19),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에 대해서 설명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18:20)

당시에는 물이 풍성하여 비옥한 토양이었던 소돔과 고모라는 상업적으로 발전된 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죄악과 타락의 도시 (이사야 3,9, 예레 23,14)로도 자주 제시됩니다. 그들의 윤리적 타락의 정도는 소돔을 방문한 두 천사들을 요구하는 소돔 사람들의 모습(19:5)이나 남색과 관련 된 단어들이 sodom이라는 공통 어근을 쓰고 있는 데에서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실지로 소돔과 고모라는3500여년 전 사해 지역의 대지진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지역 자체가 사해 지각판의 분기점에 위치해 판과 판이 만나는 지역인데다가, 천연 아스팔트라고 할 수 있는 역청과 유황 그리고 가스가 풍부한 지역이므로, 실제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는 ‘유황과 불’이 가득한 파괴의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고고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이 사해 남부의 소돔과 고모라라고 지목하는 멸망된 도시안에는 실지로 다량의 유황이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원성과 죄악이 너무 무거운 소돔과 고모라! 주님께서는 바로 이 도시를 멸망시키려고 하십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마치 중재자처럼 등장을 합니다. 주님과 인류의 중재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지요.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18:23)

현 시대에서도 그렇습니다만 고통 받는 의인들의 문제, 아무런 죄 없이도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항상 명확한 해답을 찾기는 어려운 난관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구약의 사람들에게도 또 신약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삶’안에서 ‘인과 응보’ 나 ‘권선징악’으로 설명 될 수 없는 부조리와 불합리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아브라함은 이 점을 내세워 하느님 앞에서 중재자로 나섭니다. 정의의 하느님이시라면 의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주실 수 없으신 것인지 여쭙는 것이지요. 쉰에서 시작해서 마흔 다섯, 마흔, 서른, 스물 그리고 개인이 아닌 단체의 최소 단위로 생각되었던 열명까지 그 숫자를 낮추며 어떻게든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내는 중재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러한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열명이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멸망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의인을 어떻게 보호 하시는지를 19장은 보여줍니다.
롯은 소돔을 방문한 두 천사를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모십니다. 큰 상을 차리고 누룩 안든 빵을 대접하며 손님을 대접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도시인 소돔의 사내들은 이 두 천사를 내달라고 롯의 집을 애워쌉니다. 롯은 손님 접대의 일반적 풍습대로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두 딸을 내어주면서도 이 두 천사들 만큼은 보호하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소돔 사람들은 막무가내입니다. 이민자 주재에 자신들 앞에서 재판관 행세를 하려 한다며 롯 마저 욕보이려 합니다. 두 천사들은 이에 개입하며, 소돔의 파멸을 예고하며 롯의 가족들을 구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면 의인 열명만 있다면 이들은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인 열명 조차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롯 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 모두도 구해 주시려 하십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창세 19,17)

하지만 롯은 망설입니다. (19,16) 자신의 목숨과 가족들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재산과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은 잃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갈라지면서까지 선택했던 삶의 터전과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이제 멈추어 서서도 안되고 뒤를 돌아봐도 안됩니다. 이제 선택이 내려 졌으니 그에 충실하게 소돔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19,26)

하지만 아내는 뒤를 돌아봐 버리고 맙니다. 얼마나 큰 재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고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물론 유황과 화염에 쌓인 도시를 보고 싶은 유혹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재산과 삶을 터전을 잃어야 하는 그 안타까움이, 그 미련이 뒤를 돌아보게 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나 중요한 선택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민이 되는 선택들은 그 선택들이 가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고민하지 않고 선택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최종적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차선적 선택의 좋은 점 역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신앙인이기 때문에 갈등하게 되는 모습들은 롯의 아내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롯과 두 딸들에게서 전해지는 충격적인 모압족과 암몬족의 기원 이야기는 일반적 관점의 근친상간이 그 초점이라기 보다는, 대를 잇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가족의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내를 잃고 도시가 멸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한 롯과 두 딸들은, 초아르에 사는 것이 두려워서 산으로 올라가 굴 속에서 살게 됩니다. 롯의 사위가 될 사람들은 롯의 이야기를 우습게 여기며 소돔을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산 위 굴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두 딸들은 그 누구에게서도 자손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이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그 대를 잇게 되지요. 이렇게 태어난 아들들이 바로 모압족의 조상이 된 모압(나의 아버지로부터)과 암몬인들의 조상이 된 벤 암미(내 민족의 아들)입니다. 이는 이스라엘과 오랜 기간 적대관계로 지낸 모압족과 암몬 족이 그 근원에서부터 부정한 이들이 였음을 설명함과 동시에, 모압족과 암몬족도 사실은 아브라함과 같은 혈통이었음을 밝히며 롯의 집안과 아브라함의 연결고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의 중재자이자 소돔과 고모라의 성읍의 멸망 앞에서 기억되었던 아브라함은 20장에 와서는 다시금 예전의 삶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하느님 앞의 중재자가 될 정도로 성숙한 아브라함이었지만 그럼에도 많은 인간적인 약함과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성서는 전합니다.
그라르에서 나그네 살이 하는 아브라함은 또다시 아내를 자기 누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20,2) 사라 역시도 아브라함이 오라비라고 대답하지요. (20,5) 현대의 상황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냉정히 따져 보면 이는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민족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친족 간의 혼인이 자연스러웠던 시대상과 유대의 피는 모계를 따르기에, 비록 같은 아버지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어머니가 다르면 혼인도 가능했다는 점은, 아브라함이 적어도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요. 이집트에서 파라오와 파라오의 대신들 앞에서 했던 같은 목적과 행동을 아비멜렉 앞에서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축복을 받은 이로서 자신의 가족 특히 아내를 지키려는 노력이나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는 아내를 내어 주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애쓰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불리움을 받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그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어느 곳으로 가던지 오라비라고 이야기 하게 했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20,13)
‘어찌 이런 인물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자연스레 던져 보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토록 당대에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 속의 삶의 었음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또 이방의 땅에서 자신의 가족 밖에 의지할 것 없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족 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함 속에서도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가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이제 이집트에서와 같이 또다시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아브라함과 사라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도 보호하시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아비멜렉이 당대에서도 큰 범죄였던 남의 아내를 범하는 죄에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물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혼인 관계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흠 없음을 인정해 주시며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과 사라 뿐만 아니라 이민족에게도 활동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흠 없는 마음과 결백한 손’(12,5)은 아비멜렉이 죄가 없고 결백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 선물한 은전 천닢 (20,16)도 바로 같은 연장선상에서 사라의 명예를 지켜주며 사라가 모든 면에서 결백하다는 표징이 됩니다.

하느님과 아비멜렉의 대화에서 또 한가지 주의를 기울일 표현은 바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예언자’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약함과 온전히 믿지 못하는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를 예언자로 확증해 주십니다. 구약 성서 전체에서 처음으로 나오게 되는 예언자 아브라함의 모습은 전형적인 예언자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예언자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 뜻 안에서 살아가며, 소돔의 예와 같이 하느님과 인류를 중재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들의 병이 치유(20,17)되는 것 처럼, 하느님께 백성을 대신해 청원을 드리고 전달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이제 드디어 그 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듭 약속하신 후손이 탄생할 때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어 드디어 사라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름을 ‘이사악 (웃음)’이라고 짓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 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 (21,6)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기에 미래의 삶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고 따라서 웃을 수도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제 ‘이사악’을 통해서 웃게 됩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그들에게도 축복의 삶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부부에게 웃음을 가져다 줄 아들이며 길고도 반복되었던 약속 앞에서 자신들의 비웃음을 기억하게 할 아이였습니다. 이는 한계가 없으신 생명의 주관자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의 표지이자 다른 이들도 기쁘게 웃게 할 아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웃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아이에게도 할례를 베풉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 젖을 뗄 나이가 됩니다. 유대의 일반적인 풍습에 의하면 세 살 정도면 젖을 떼었고 이를 축하하는 큰 잔치를 벌이곤 했습니다. 바로 이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기쁨의 잔치가 모두에게 웃음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라의 입장에서는 이제 대를 이을 수 있는 아이, 즉, 상속할 수 있는 아들이 태어났기에 미래의 불화의 요소의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그 동안의 울분과 설움이 담긴 사라의 간청은 참으로 매섭게 느껴집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저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사악과 함께 상속을 받을 수는 없어요.” (21:10)

사실 성조사 전체를 흐르는 큰 중심에는 이러한 갈등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형제와 형제의 갈등, 부인과 부인의 갈등, 부인과 몸종의 갈등 등,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는 갈등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몸부림들과 상속권을 얻기 위한 다툼들 그리고 다툼과 갈등 속에서도 이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이 역사에 어떻게 개입하시고 계시는 지가 바로 성조들의 삶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겠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사라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이스마엘은 첫째 아들, 즉 맏아들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마엘과 하가르는 빵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가지고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공동의 삶의 터전에서 광야로 쫓겨난 다는 것은 당대의 상황상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여인 홀로 아이를 데리고 떨어진 다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였지요. 이는 사라도 또 하가르도 아브라함 조차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브에르 세바 광야를 헤메이던 하가르는 아기를 덤불 밑으로 내던져 버리고는 거리를 두고 아기와 마주 앉아 목놓아 웁니다. 이스마엘은 곧 죽을 것이고, 이는 자신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비탄을 외면치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이 울음 소리를 귀여겨 들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도 하나의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하시고 언제나 그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홀로 있을 때 두려움과 죽음의 장소였던 광야가 이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약속과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하가르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하가르는 우물을 보게 되지요. 그 이전에도 이 우물은 있었겠지만, 하느님께서 눈을 열어주시어 보게 되고 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7과의 ‘야훼 이레’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이는 7과에서 더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1장의 마지막 부분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에 대해서 전해 줍니다. 하가르가 헤매이기도 했던 ‘브에르 세바’ 우물 이름의 기원을 두 가지 전승의 모습으로 전해줍니다. 첫째는 아비멜렉 임금과 피콜 장수가 상호간에 호의를 베풀 것을 하느님 앞에 맹세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브라함이 빼앗긴 우물에 대해 따지며, 일곱 마리의 양들로 아비멜렉에게 이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확증 받으며 상호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브에르’는 ‘우물’이라는 뜻을 가지며, ‘세바’는 ‘맹세’와 숫자 ‘일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브에르 세바’는 바로 이 상호간의 사건을 기억하고 지켜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름이 되며, 이는 후손들에게도 이 사건을 기억하게 할 이름이었습니다.
2014-11-25 18:23:47 from 220.67.7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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