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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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과 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느님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창세기 1부는 세상과 사람의 창조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또한 죄가 어떻게 발생되고 확대되고, 그 죄 앞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어떻게 전해지는지를 알려줍니다. 창세기의 2부는 11장의 후반부부터 창세기의 마지막인50장까지로 성조사 즉, 성조들의 삶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성조들의 역사와 삶의 이야기는 단순히 4대 (아브라함-이사악-야곱-요셉)에 걸친 이스라엘 성조들의 개인사가 아니라, 바로 이 성조들의 삶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고 그 역사를 이루어가시는지, 또 하느님의 축복안에 성조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고 살아갔는지에 대한 신앙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5과 아브람의 이야기는 테라의 족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테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라이 그리고 손자 롯을 데리고 고향 땅이었던 칼데아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갑니다. 그들은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자리잡고 살게 되지요. (11:31) 칼데아의 우르 사람이었던 아브람이 하란에 머물러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여전히 가나안입니다. 하란에서 오래 머물 수도, 짧게 머물 수도 있었지만 하란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습니다. 유목민의 특성상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잠시 이민을 갔다 할지라도 다시 돌아올 그들의 고향땅은 칼데아의 우르로 남아 있게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 (12:1-2)

하느님께서는 고향 땅을 떠나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복을 내리며, 이름을 떨치게 해 주시겠다는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 축복의 약속 앞에 아브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사라이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에게서 당연히 큰 민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대를 잇는 다는 것이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인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듯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도 대를 이어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 했습니다. 자손은 자신의 대가 끊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족의 노동력을 의미하기도 했으며,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다산은 가장 큰 축복중의 하나였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사라이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사고 방식에 견주어 보면 아브람은 축복 받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고, 마치 죽은것과 다름없이 여겨 졌습니다. 근동지방에는 자신의 후손을 통해서 자신이 계속 살아 있는 것이며, 자신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브람은 미래의 삶이 단절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그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었고, 더 이상 그 생명은 이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생명이 이어질 수 없는 아브람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난 하란이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손 롯을 통해서 그의 생명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상황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십니다. 단 한명의 자손도 없고, 앞으로도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는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축복의 약속을 아브람이 듣고 있는 것이지요.

더불어 하느님께서는 고향 땅을 떠나 당신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땅은 가나안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냉정히 생각해 보면,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이민 온 다른 사람들을 환대하며 기쁘게 맞이하는 나라가 없듯이, 당시에도 가나안 사람들이 칼데아 우르에서 온 아브람을 환대할리는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에게 땅을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근동의 풍습으로 보았을 때, 아브람이 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가능성은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경우에는 적어도 자신이 묻힐 땅을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즉, 이는 하느님의 약속 안에서 아브람이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축복의 표지는 그 무엇도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자손의 축복을 약속 하시지만, 성경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도착해도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더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고향은 사실 땅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칼데아 우르 사람이고, 그곳이 바로 자신의 고향입니다. 일반적으로 부족사회가 그러했듯이 고향은 단순히 살고 있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척과 부족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터전, 자신의 삶의 경험과 역사가 모두 담겨져 있는 그 땅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초대입니다.

사실 이미 보았듯이(11:31), 아브람은 이미 자신의 고향땅을 떠났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어도 자신의 고향땅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보여주시려고 하는 가나안땅은 이미 가려고 했고, 또 자신의 여정 중에 이미 가고 있었던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떠남은 언제던지 다시금 돌아올 수 있는 떠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이 여행의 성격을, 이 떠남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아버지 테라를 따라서 가족들과 함께 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간다고 해서 자신의 고향이 칼데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테라에 살건, 가나안에 살건 자신이 돌아갈 고향땅은 칼데아의 우르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이제 아브람은 가나안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보여줄 땅에서 살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큰 민족이 될 것입니다. 즉, 그는 가나안 사람이 될 것이며, 평생을 그곳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배경과 근원을 버리고,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개입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올 때 어떠한 변화들이 나타나게 되는지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떠남도 지금의 떠남도 같은 떠남이었지만, 그 내적 성격은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는 이제 모든 가족과 배경을 떠나서 당신이 보여주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의 약속을 믿고, 그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아브람이 바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순명하며 따랐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 어떤 축복의 표지도, 어떤 확증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사라이는 임신을 못하는 여인이었기에 자신이 큰 민족이 되리라는 약속도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었고, 땅에 대한 약속 역시 이루어지기는 힘든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순명합니다. 이 순명이 불확실한 미래를 축복의 길이 되게 하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 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 순명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준비해주신 여정에 동참할 수 있었고, 축복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명했다고 해서, 하느님 보시기에 완전한 신앙인이 되었거나 신앙적으로 온전히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성장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12:7)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과 함께 가나안 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당신이 보여주신 땅에 도착하였지만, 아브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새로운 약속을 받습니다. 당신 말씀을 믿고 따랐으니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겠으나,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새로운 약속을 하십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것 말고는 사실 아브람의 상황에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그 땅의 주인인 가나안족이 살고 있습니다. 사라이는 이미 태가 닫혀 버린 아이를 못 낳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태연히 아브람도 아니고 아브람의 후손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아브람이 땅을 얻을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이 현실적 상황들과 축복의 약속의 긴장속에 아브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잘 알고 있소.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 (12:11-13)

가나안의 베텔에서 네겝 쪽으로 옮겨 갔던 아브람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아브람은 이집트에서의 자신을 위해 부인을 이용하려 하지요. 아름다운 여인인 사라이를 이용해서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도 잘 되려 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지탄받아 마땅할 남편의 모습이 바로 아브람의 모습이며 자신의 부인도 지키지 못하는 이가 바로 아브람입니다. 힘없고 나약하며 자신의 아내조차 이용할 수 있는 기회주의자 같은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서는 등장 인물들의 나약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악들, 잘못들, 교활함의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 전해 줍니다. 그러한 나약함을 지니고 있는 등장 인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서 성장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현대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의 일로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가지 큰 재앙을 내리셨다.” (12:17)

이집트인들이 보기에 사라이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파라오와 대신들이 사라이를 보고 칭찬하여, 파라오는 사라이를 아내로 삼으려고 합니다. 아브람은 그 덕으로 양과 소와 수나귀, 남종과 여종, 암나귀와 낙타까지 얻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시지요.

사실 창세기의 하느님은 성조들의 가족 신, 민족 신의 모습으로 자주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유배 당시에도 민족과 민족의 전쟁은 각각의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의 전쟁으로 여겨졌었고, 그래서 전쟁에서 이기는 민족의 신이 더 위대한 신이라는 다신론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당대의 초강대국이며 강력한 신을 모시고 있는 파라오에게도 재앙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시며, 거대한 힘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아브람 가족의 처지를 굽어 살피시고, 힘의 불합리함을 조정하시는 분으로서 등장하십니다.
아브람은 아직 땅도 자손도 얻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제 또 다른 축복의 상징인 ‘부’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문제가 생깁니다. 성조사안에서는 우리의 삶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갈등과 분쟁의 모습들이 드러납니다. 그 갈등과 분쟁 속에서 하느님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브람은 이제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가 됩니다. 오히려 이제는 재산이 너무 많아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이 함께 살기에도 벅찰 지경이 됩니다.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13:1-7) 현실적으로는 보면 아브람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조카 롯을 통해서 자신의 대를 이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롯은 갈라서야만 했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한 가족으로서 살았지만, 오히려 풍성해진 부는 서로가 서로를 갈라서게 하고 맙니다. 땅도 자녀도 없었던 아브람은 이제 재산마저도 서로 나누어야 하며 한 가족이었던 조카와도 서로 갈라서야 됩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자신이 갈 곳을 선택하게 하지요. 롯은 여러 도시들이 가까이 있는 요르단 들판을 선택하여 소돔과 주변 도시에서 살게 되고, 아브람은 도시에서 떨어진 가나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이후에도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축복의 약속을 하십니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3:15-16)

롯과의 결별로 아브람은 자신의 대를 이을 유력한 방법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또다시 눈을 들어 보이는 땅을 아브람과 후손에게 영원히 주실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땅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일구고 지킬 수 있는 후손을 땅의 먼저처럼 많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여전히 그에게는 땅도 후손도 그 어느 것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당신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창세기 14장에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살렘 임금 ‘멜키체덱’ 입니다. 조카 롯이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브람은 장정 삼백 십팔명을 데리고 밤에 기습하여 조카 롯을 구해오지요. 이 때에 소돔 임금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멜키체덱’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 표현되며, 마치 미사의 제물과 제주를 봉헌하는 것 처럼,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옵니다. 물론 이를 식사를 위한 빵과 포도주로 생각 할 수도 있지만, ‘멜키체덱’은 구약과 신약을 포함해서 사제직의 전형이자 모범으로 제시되는 인물입니다. 사제직을 떠올릴 때면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이 ‘멜키체덱’이며, 그 이름의 뜻조차도 ‘정의로운 나의 임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사와 더불어 통치와 재판을 함께 담당했던 당대의 신정사회를 생각해 볼 때,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의로서 시시비비를 가려줄 수 있는 진정한 사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아브람을 만난 ‘멜키체덱’은 찬미가를 통해서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 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14:19-20)

아브람은 하느님의 사제 멜키체덱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던 것처럼,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아브람은 멜키체덱에게 지금의 십일조와 같이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감사 예물로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돔 임금의 제안 앞에서는 그 자신이 되찾아 온 사람과 재물들 그 어느 것도 갖지 않고 모두 되돌려 줍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적들을 아브람의 손에 넘겨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십니다. 이 계약은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십니다. (15:5) 이는 후에 개인의 선행 없이도 오직 믿음만 있다면 하느님께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의화 논쟁’의 근거로도 쓰이게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심을 믿는 그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따라서 삶 보다는 오직 굳은 ‘믿음’만이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 받는 데에 가장 중요한 척도라는 개신교의 주장과 인간의 믿음과 행동이 함께 조화로워야 참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가톨릭과의 논쟁의 중심에 놓였던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기도 합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거듭된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15:2)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아직도 자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집안의 상속은 자신의 종이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로 당신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분이심을, 즉,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분이시고 약속대로 아브람의 후손은 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많아질 수 있을 것이며, 그 상속자는 아브람의 몸에서 직접 나온 아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그 직접적인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이 원하시는 표징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후손이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 하며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고, 그러나 많은 재물을 가지고 그곳을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뛰어 넘어 온 세상의 주재자이심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아브람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와 그 탈출을 미리 알려 주시며 이를 표징으로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시며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이제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땅은 바로 아브람의 후손들의 땅이 될 것입니다.

16장의 사라이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몸종 하가르를 통해서 대를 이으려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친척을 입양하는 일 외에 자신의 몸종을 빌어서도 대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자손이 아니라 사라이와 아브람의 인간적 생각과 방법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계획대로 하가르는 임신을 하게 되었으나 이는 곧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바로 임신한 종 하가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주인 사라이를 업신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가르는 제 주인을 피해 도망치게 됩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가르는 샘터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는 하가르에게 예상치 못한 축복의 말씀을 전합니다. 임신한 사실을 안 후 자신의 주인을 업신여기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주님의 천사는 바로 그 하가르에게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고, 그를 하나의 민족이 되게 해 준다는 축복을 약속을 전합니다. 이스마엘은 분명 성조들의 이야기의 중심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한 민족이 되게 하시고,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비록 당신의 계획안의 축복된 이가 아니었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와도 함께 하시고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당대에 새로운 이름을 얻는 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의미했고, 삶의 성격과 방향이 새롭게 규정되어 짐을 의미했습니다. 성조들의 경우도 새로운 이름을 얻는 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의 삶이 드디어 시작되는 것입니다. 땅과 후손의 약속과 계약은 이제 더욱 구체화 됩니다. 이제 계약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할 약속이 됩니다. 할례가 하느님 백성으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사라이 역시도 이제 ‘사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사라’는 아들을 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약속앞에 씁쓸한 웃음을 짓습니다. 믿을 수 없는 약속,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 앞의 아브라함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사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은 이 긴 삶의 여정속에서 탄생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하느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그는 순명의 여정을 걸어가고,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의 말을 마음의 새기고, 하느님 안에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4-11-20 18:42:12 from 115.95.9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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