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과 홍수와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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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과 홍수와 바벨탑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과 같아 지려 했던 사람의 모습!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을 얻으려 하고 가지려 하는 사람의 모습은 우리의 교만이 어떠한 것인지 또 유혹이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잘 바라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죄의 시작이었지요.
죄의 발생과 확대가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개인적 차원의 갈등과 죄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이 갈등은 사람들의 무리, 즉, 인류와 하느님 사이의 갈등으로 확대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홍수 이야기와 바벨탑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창세기 6장의 첫 시작은 사실 우리를 좀 당혹스럽게 합니다.

땅 위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여자들을 골라 모두 아내로 삼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살덩어리일 따름이니, 나의 영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백이십 년밖에 살지 못한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나필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서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6,1-4)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아들들과 같이 딸들도 태어나고 많아졌으리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들을 골라 내어 아내로 삼았다라는 이야기는 사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어려움을 안겨 줍니다.

‘하느님의 아들들’ 조차도 아름다운 딸들만을 골라서 아내로 삼았으니,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을 찾는 것은 이미 ‘하느님의 아들들’ 때부터 시작된 거부할 수 없는 성향이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대체 하느님의 아들들은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느님의 아드님은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신데, 이외에도 다양한 하느님의 아들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을까요?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들게 됩니다.
이 문제 앞에서 70인역은 ‘하느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의역해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그리 흡족하게 설명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갑자기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장면이 된 것 같은 이 6장의 첫 시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해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먼저 설명해 주시고 알려주시지만,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해는 하느님 의 설명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 체험을 통하여 깊어지고 풍성해 집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하느님 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라는 구약의 하느님 계시는 아직 온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단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비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시는 분이시고, 파라오를 거슬러 우리를 구해내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시며, 우리를 돌보아주시는 참된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이집트의 탈출을 통해서야 가능해 집니다. 더 나아가서는 유배 이후에 가서야 온전히 이해 된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세기 안에서도 야곱이 라반에게서 달아날 때, 라헬이 집안의 수호신들을 훔쳐 가는 모습 (31:19)은 하느님 이해의 좋은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멀리 창세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불안한 미래 앞에 때 점 집을 찾아가거나, 기복적 행위들에 집착하는 우리 신자들의 모습을 볼 때에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는 모습은 어제 오늘 일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말 표현으로는 그 감이 잘 살지는 않지만 성서 원문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들에서 하느님 앞에는 정관사가 붙여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이라고 하면 관사가 필요치 않지요. 영어로 하면 Sons of God 가 아니라 Sons of the God라고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즉, 성서 원문 의 표현 안에서도 사실 일반적인 하느님 이해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들에 대한 표현은 당대에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되며 신들이라고 생각되었던 산, 바다, 바위, 용들등 다신적인 신관의 배경하에서 나온 부분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신론적 세계관 안에서 살고 있었던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도 있겠습니다.

두번째로는 원인론적인 관점에서의 설명을 살펴 볼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6장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여 태어난 이들이 나필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을 용사들로서 이름난 장사들이라고 합니다. 이 나필족은 민수기 13장 33절에도 등장하는데, 사십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돌아온 이들이,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지만, 가나안 땅으로는 올라가지 못한다고 모세에게 진정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땅에 나필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뚜기 같이 보인다며, 이들은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큰 이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서는 태어날 수 없는 이들이 바로 나필족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는 신화들처럼, 인간에게서 나온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들’에게서 나온 이들이다, 즉, 인간과 신의 결합안에서 나온 이들이다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의 관점은, 이들이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파라오가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아내로 삼으려 하자,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재앙을 내리십니다. ‘인류의 죄’가 자신의 욕구와 욕망속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인 ‘아브람’과 ‘사라’를 지켜 주시기 위해서 이 부당한 현실에 개입하셔서 정리해 주십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관계 안에서 태어난 이 나필족은 단순히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부정한 이들이요, 인간과 신의 결합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는 ‘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5절의 말씀처럼, 이제 개인과 하느님, 개인과 개인을 뛰어넘는 인류와 하느님 사이에 죄악과 부정과 악이 많아지게 되었다라는 것을 바로 이 나필족으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부정한 세상에 어떻게든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고, 결국 이 부정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홍수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라는 인과 관계가 성립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사람과 짐승,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도 쓸어 버리시겠다고 결정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세상을 왜 쓸어버리시겠다고 결정하십니까?
바로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고,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6,11)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 앞에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폭력으로 가득찬 세상이 바로 하느님께서 홍수로 쓸어버리려고 결정하신 이유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폭력과 당신 앞에 타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었고, 의롭고 흠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6,8-9) ‘노아’의 히브리어 어근을 살펴보면, ‘위로’와 ‘후회’의 상반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반된 뜻이 본문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이름이 됩니다. ‘라멕’이 아들을 낳고 이 아이가 바로 땅 때문에 수고하고 고생하는 자신들을 위로해 줄 것(5,29)이라며, 위로의 이름으로 ‘노아’를 지었다면,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던 하느님의 ‘후회’도 역시 ‘노아’이며, 의롭고 흠 없으며 하느님께 함께 살아간 ‘노아’가 바로 인류의 새로운 시작의 위로자가 되는 것이지요.

사실 이 대홍수의 이야기는 성서에서만 언급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큰 강을 중심축으로 생활했던 민족들에게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이 홍수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실지로 고고학적으로도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엄청난 물난리가 있었다는 발굴이 있다고 하니, 이는 고대 근동지방의 체험적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원전 2000년 경의 초아트라하시스의 서사시나 길가메쉬의 서사시에 나오는 세상을 파괴하고 위한 신이 내린 홍수의 이야기와 구조는 사실 성서의 내용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초점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는 홍수의 원인을 세상의 타락과 폭력에서 그 뿌리를 찾고 있습니다. 인류 전체에 악과 죄가, 타락과 폭력이 가득 차게 되었음을, 그래서 당신의 개입 없이는 창조하신 세상의 창조 질서가 회복될 수 없는 상황임을 이야기 합니다. 이에 하느님의 개입, 창조 질서의 회복, 하느님 정의의 실현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하느님께서는’ 노아’를 선택하셔서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노아’가 의롭고 흠이 없다고 해서 그가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거짓 없는 올바른 의로움과, 하느님과의 관계안에서 흠없는 노아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기에 하느님께서는 ‘노아’를 선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사실 이 ‘방주’라는 단어는 구약 성서 안에 ‘창세기’와 ‘탈출기’에서만 언급되는데, 이는 어린 모세를 태웠던 ‘왕골 상자’(탈출 2:3)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이 함께 하는 특별한 장소를 뜻하게 되겠습니다. 사실 그 형태도 의미가 있습니다. 방주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솔로몬의 성전 형태와 그 기본적 구조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장소에 적합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창조에 의해 혼돈의 세상이 질서 지워지고 조화롭게 되었다면, 이제 다시금 폭력과 타락으로 인해 홍수를 통해 혼돈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명령을 하시고 ‘노아’와 계약을 세우십니다.(6,18) 이는 창세기9장의 홍수 이후의 노아와 자손들과도 이어질 계약이었습니다. 노아는 아무런 말없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합니다. (6,22;7,5,9,16) 하느님과 함께 사는 ‘노아’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홍수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다르거나, 마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성서 일반에서 살펴 보았던 전승들에 관한 내용이 이를 이해하는데 한 해답이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야훼계(J) 문헌이고, 저 부분은 엘로힘계(E) 문헌이다라는 엄격한 구분에 대한 집중보다는 이러한 문헌을 어느 것이 옳고 그른것으로 구별하고 선별한 것이 아니라, 전승에 따라 전해져 온 이 말씀들을 둘 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성서 말씀에 함께 수록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 예들을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 배에 데리고 간 짐승들
o J : 숫놈과 암놈 일곱 쌍, 하늘의 새들도 일곱쌍 (7,2-3) : 완전함을 뜻하는 7
o E: 온갖 생물 가운데 한쌍씩, 수컷과 암컷, 한쌍씩 (6,19-20),
모든 살덩어리들 둘씩(7,15-16): 둘은 좋은 숫자가 아님, 부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도
배려 하시는 하느님.
• 방주에 들어가는 장면의 불일치
o J: 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이동
o E: 노아는 자기 아들 셈과 함과 야펫, 자기아내, 그리고 세 며느리와 함께 방주로.
• 비가 내리는 기간
o J: 사십일동안 밤낮으로 (7,4) : 40은 완전을 뜻하는 숫자 (예: 사순과 대림)
o E: 물은 땅 위에 백오십 일 동안 계속 불어났다. (7,24)
• 희생제사
o J: 희생제사의 강조, 사람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파멸 않기로 약속(8,20-22)
o E : 방주와 하느님이 노아와 맺은 계약을 강조.
• 홍수 후
o J: 모든 생물이 다 죽었다. (7,21-23)
o E: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사람과 짐승만 남았다. (7,23절)

홍수후에는 하느님의 새로운 계약과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노아’는 감사의 제물을 주님께 바치며, 제사를 올립니다. 당신의 축복과 함께 계약의 표지로 ‘무지개’가 제시됩니다. 이 축복은 번성하여 온 땅을 가득 채우리라는 현세적 축복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자주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계약의 장면이 제시되는데, 바로 이 ‘노아’와 하느님의 계약의 장면은 하느님과 백성의 계약의 성격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 일반적으로 계약은 상호 계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약은 먼저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요. ‘노아’의 응답이나 계약과 조건에 대한 동의 없이도 거져 주어진 축복으로서의 계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후의 계약들은 하느님의 선물이 먼저 주어진 이후에, 이에 충실한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응답들이 요구되지만, ‘노아’의 계약은 온전히 거져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는 당신의 징벌보다도 더 큰 축복으로 연결되는 계약이자, 심판자이자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타락하고 폭력으로 가득 찬 인류와 다시금 조화로운 질서를 회복하시고, 당신의 새로운 창조를 지속하신다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조상 함이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취한 태도(9,22)로 인해서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된다 (9,26)라는 이야기는 유다 민족의 조상이 되는 ‘셈’에게 가나안 민족의 조상이 되는 ‘함’의 관계를 통해서, 탈출 이후의 유다 민족들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것을 암시함이자 원인론적인 설명을 제시합니다. 또한 이는 ‘함’과 ‘셈’의 태도의 대비를 통해서, 다른 이의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어야 하는 기본적 삶의 자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여 줍니다. ‘노아’의 세 아들의 족보로 이어지는 10장의 내용은 하느님의 축복속에서 이들이 각각의 민족(함: 가나안의 조상, 셈: 고대 근동민족의 조상, 야펫: 터키와 그리스 지역의 조상)을 이루고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창세기의 1부(1장-11장)의 마지막 부분인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흔히들 세상의 많은 언어와 문화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으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흐름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언어로 나누어졌는가? 왜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활동하셨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세상의 창조에서부터 사람의 창조에까지, 하느님은 조화로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세상의 모습은 그렇게 조화롭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하느님과 인류에까지 이 갈등과 부조화는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이러한 부조화에 하느님께서는 개입하시며, 무엇이 옳은 길인지, 어떠한 길로 가야 할 것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창세기의 1부를 마무리하는 이 여정 속에 바로 바벨탑이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끝없는 교만과 오만 그리고 무질서의 모습을 창세기는 연이어 전해줍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큰 축복과 선물을 받았음에도 이내 그것이 당연해져 버리고 쉽게 잊어버리며 타락해 가는 인류의 모습과 이에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비하며 전해줍니다. 마치 우리 신앙의 삶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말입니다.

11장에서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주하다가 신아르, 즉, 아시리아 지방에 정착하게 되었음을 전합니다. 여기에 큰 변화가 있게 되는데, 사람들이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라는 점입니다. 돌과 진흙으로 짓는 집이나 건축물은 그 규모에 있어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짚과 진흙을 섞어 만든 ‘벽돌’과 지금의 아스팔트와 비슷하며 근동 지방에는 풍부한 ‘역청’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인류 문명의 진보와 함께, 이제는 건축의 규모와 기술이 획기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술적 발달 속에 자신감이 생긴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려 합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11,4)

자신감이 생긴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려고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 또 이름을 널리 퍼뜨리는 명예에 대한 욕구가 굉장히 강한 것처럼, 이 때에도 사람들이 탑을 세워서 하고 싶은 것은 바로 자신들의 명성을 날리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울 수 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처럼 하늘까지 우리의 탑을 쌓을 수 있고, 그 하늘에까지도 우리의 명성이 닿을 수 있다.’라는 모습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향성, 그 오만의 모습을 창세기는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는 다는 것이, 그 위대한 업적을 행하려 한 것이 잘못이라기 보다는 바로 그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성을 잊은 채,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속에서, 마치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과 착각, 그 위험성을 창세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11:6)

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서 그것을 보고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께서 말을 뒤섞어 놓자 오히려 그들은 온 땅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은 ‘바벨’이 됩니다.

바빌론의 수도의 이름이기도 한 바벨 (에제키엘 12,13, 2열왕기 20,17, 예레27,16)은 기본적으로 ‘혼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원적으로 보면 ‘하늘의 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요. 그렇게 보면, 이 탑의 이름으로 ‘바벨’만큼 좋은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술의 발달과 문명의 발달 속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줄 ‘문’을 지어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고,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이는 결국 하느님의 개입과 ‘혼돈’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다가 되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의 1부의 하느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지만, 개인적 차원이건 전 인류적 차원이건, 그것은 자신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과 욕심에서 벗어날때에 가능한 것임을 지속적으로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당신의 사랑과 축복을 내려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이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의 오만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느님의 보호의 ‘개입’이고, 하느님과 인류의 관계를 넘어서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그러한 오만과 한계를 넘는 것을 경계하며,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도록 초대하고 계신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2014-11-08 12:17:50 from 223.62.18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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