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과 죄의 발생과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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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죄의 발생과 확대

3과 죄의 발생과 확대는 원죄에 대한 요약을 전합니다. 사람이 어떤 유혹을 받게 되는지, 또 유혹들 앞에서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이를 통해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게 되는지를 설명 합니다. 더불어 죄를 지은 이후에 그 결과로 어떠한 일들이 뒤따르게 되는지 전해줍니다.

2과에서 선악과를 먹는 다는 것에 사람이 하느님과 같아 지고자 하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설명 드렸습니다. 이 명령은 나와 하느님이 같지 않다는 경험과 앎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의 통교는 사람과 하느님이 다르다는 전제 안에서 가능한 부분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사람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세상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통교(아담과 하와)안에서 사람은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이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하느님과 나 자신이 같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하느님이 되려는 욕망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계명은 강압적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적 성격의 계명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초대하는 계명이요, 인간과 하느님의 통교 안에서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도록 초대하는 선물로서 주어진 계명 이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합니다. 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뱀을 ‘간교하였다’고 표현합니다. ‘간교함’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뱀이 간교함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뱀이 간교함을 숨길 수 있는 능력까지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성서는 볼 수 없도록 숨기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 즉, 간교함을 지닌 이가 바로 뱀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뱀은 유혹에 가장 적합한 등장 인물이 됩니다.

뱀은 자신의 간교함을 숨기고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혹이 명백하게 드러난 잘못이나 악이라면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은밀하게 숨겨져서 다가오거나 악한 듯 하면서도 선함으로 포장이 되면 고민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것이 아닌가? 이 정도는 남들도 다 하고 있으니까.’ 하면서 스스로에게 관대해 지곤 합니다.

유혹자 뱀은 이렇게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여러 피조물중의 하나로서 등장합니다. 만약 뱀이 우리가 상상하는 악마의 모습이거나 아주 흉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등장했다면, 분명 여인은 먼저 경계를 하고 멀어지려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뱀은 자신을 잘 숨기고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뱀의 교활함은 여인과의 대화 안에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역설적이게도 뱀은 여인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라는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뱀은 대화를 통해서, 여인이 알고 있었던 하느님과 하느님의 규율들에 혼란을 주어 의심을 증폭시키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내용들만을 던져줍니다. 선택에 대한 행동은 이제 여인에게 남겨진 몫이 됩니다. 여인과 뱀의 대화는 우리 삶에 있어서 유혹의 기본요소들과 유혹이 어떻게 작용하고 활동 하지는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3,1)

사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문장이 질문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뱀의 첫 질문은 하나의 단정지은 문장으로 제시됩니다. 원문을 그대로 해석해보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먹지 말아라.’” 가 됩니다. 뱀의 이 말은 자연스럽게 ‘아니야, 그렇지 않아!’ 라는 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대화를 할 때에 완전히 잘못된 것을 먼저 이야기하면, 자연스럽게 ‘아니다’라고 반문을 하게 됩니다. 뱀의 질문은 바로 어떠한 의심도 없이 자연스럽게 반문하게 되는 질문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아니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뱀은 어떤 나무 열매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인이 뱀에게 자연스럽게 반문을 하는 것을 보면, 뱀이 첫 질문부터 얼마나 교묘하게 대화를 이어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3,2)

그런데 여인의 답변이 좀 이상합니다.
모든 열매들이 그냥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로 축소되었습니다. 더 이상 당신께서 마련해 주신 큰 축복, 즉,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초대한 선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라는 하느님의 명령도 왜곡되어 답변됩니다. 여인에게 이 열매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아야 하는 열매로 남게 됩니다. 사실 먹는 다는 것과 만진다는 것은 그 의미가 좀 다릅니다. 2과에서도 설명 드렸던 바와 같이 먹는 다는 것은 나의 일부가 되고, 그것을 소유하게 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만진다는것은 그 내면까지 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답변은 여인이 그 열매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 열매를 먹으면 죽으니까, 그것은 먹지도 만지지도 말아야 할 열매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분리의 규정이자, 사람이 하느님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했던 계명이, 이제는 만지지도 말아야 한다는 덧붙임 속에서 사람을 속박하고 구속하는 법적 규율로서 남아있게 됨을 보여 줍니다.

여인은 하느님께서 왜 그 나무를 먹지 말라고 했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여인의 대답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에서도 단절되고, 당신의 계명에로의 순명을 통한 삶의 기쁨은 더 이상 불가능해 집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 역시 613개의 넘는 율법 조항들이 있었고, 이 규정들은 당신께로 나아가기 위한 도움을 주는 법이 아닌 사람을 속박하는 법이 되어버렸기에 예수님께서는 율사들에게 강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구속하고 속박하는 법!’ 바로 여인에게 하느님의 계명은 속박과 구속의 법으로서 다가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3, 4-5)

뱀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하느님의 법 규정 앞에서 상상했을 그 생각들을 단정짓듯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먹으면 선과 악,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는 매우 합리적 해석으로 보여지면서 뱀은 자연스럽게 빠져 나갈 수 있는 준비를 다 마칩니다. 사실 뱀의 말은 바로 증명 할 수 없습니다. 그 열매를 따서 먹지 않고서는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답변인 것입니다. 여인으로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먹지 않거나, 아니면 뱀의 말을 듣고서 열매를 먹거나 두 가지의 선택만이 남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여인에게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은 왜곡 되었습니다.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과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라는 교묘한 유혹은 이 여인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니, 이미 상상하고 있었던 의심을 확신으로 이끌어 주었겠지요.

사실 뱀은 끝까지 열매를 먹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교묘함으로 의심을 증폭시키는 유혹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인의 갈등과 고민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하느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처음의 감사와 기쁨은 이내 의심과 유혹으로 변화되어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고, 마치 하느님께서 당신과 같이 되는 것을 질투하고, 두려워하여 그러한 명령으로 자신을 겁주는 분으로 단정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발생이고,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지요.

여인은 그 열매를 바라봅니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열매를 하나 따 먹고, 남편에게도 줍니다. 얼마나 보기 좋은 장면입니까? 여러분은 이 장면에서 서로 열매를 나누어먹는 진정한 부부애를 느끼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지요. 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가 여인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금지된 명령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지를 알기에 여인은 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남편에게도 그것을 주어 공범자가 되게 합니다. 남편 역시도 자신이 먹으려 한 것이 아니라 부인이 주었기에 먹었다는 보호막을 치며, 자신이 빠져 나올 구멍을 만들어 놓고 열매를 먹습니다. 나는 그럴 마음도 의도도 없었지만,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죄’ 앞에서의 핑계를 대는 태도를 이미 첫 사람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하느님의 말이 아니라, 뱀의 말이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절대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진짜로 죽지 않은 겁니다. 그러나 뱀이 말한 것처럼 하느님처럼 되지도 선과 악을 알게 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진실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바로 자신이 알몸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자유로운 통교가 가능했던 사람은 이제 새로운 진실 앞에 서게 되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단절을 겪게 됩니다. 벌거벗음의 상태는 사실 상대방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다 보여줄 수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제 이들에게는 새로운 현실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다 마련해 주시고 보호해 주셨기에 그 어느 것도 필요한 것이 없었던 사람이, 이제는 두렁이로 자신을 가리고 보호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남자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제 사람은 ‘두려움’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친교와 신뢰 뿐만이 아니라, 서로간의 신뢰와 친교에서도 문제가 생깁니다. 이제는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발생된 결과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 앞에 부끄럽게 되어, 자유롭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던 에덴 동산은 이제 자신을 숨겨야 하는 두려움의 장소가 되고 맙니다.

이 두려움의 장소에 하느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3,8)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던지신 질문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즉, 위치에 대한 답을 묻는 질문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질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질문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인식과 행동을 만나게 하고, 이를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질문인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3,11)

질문은 계속 이어집니다. 당신의 질문은 추궁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잘 살펴보면, 사람의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질문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죄와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인간이 저지른 죄의 모습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3,12)

언뜻 보면 여인이 나무 열매를 주어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는 여인에 대한 비판만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 라는 표현은 사실 하느님께로도 그 화살이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함께 살라고 여인을 주지 않았으면 나는 열매를 먹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도 포함되어 있는 답변인 것입니다. 이제는 여인뿐만이 아니라 하느님도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3,13)

여인의 대답에서도 이 경향성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도록 질문하시는데, 나는 잘못이 없고 다른 이들 때문이라는 답변만이 돌아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다른 희생양을 찾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여인의 대답을 조금만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남자와 같은 답을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납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다라는 답변에서는 간사한 뱀이 먼저 자신을 유혹한 것이 문제가 됩니다. 뱀이 간사함을 가지고 유혹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역시 자신의 잘못보다는 뱀과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시작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 대한 원망과 비난으로 확대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겠습니다.
사람의 대답에서 보여지는 것은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다른 이들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가 어떻게 발생되고 확대되는 지, 또 죄의 움직임들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가지 집중해 볼 동사가 있는데 바로 ‘듣는다’라는 동사입니다. 우리말에는 ‘듣는다’라는 표현이 한가지이지만, 마치 영어의 Listen과 Hear처럼, 히브리어로는 서로 다른 동사가 쓰여져 있습니다. 8절과 10절의 하느님이 거느시는 소리나 당신의 소리는 그냥 들리기에 듣는 것이지만, 17절의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포함 되어 집중해서 듣는다라는 뜻의 동사가 쓰여져 있습니다. 즉,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아내의 말을 듣고 열매를 먹었음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잘못을 고백하기 보다는 다른 이를 탓하며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양 변호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궁지에 몰렸을 때의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나약함의 모습이요, 죄 앞에서의 인간의 경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에서 체험하는 것처럼, 죄는 죄에 대한 인정과 고백 없이는 죄에서 벗어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지게 됩니다.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 때문에 또 다른 거짓말을 하여 더 깊은 죄의 나락에 빠져드는 것 처럼, 죄는 죄에 대한 인정과 고백이 무엇보다 앞서 이루어져야 함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이 전해주고 있는 원죄의 모습이며, 죄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여인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게 될 것이고 사람은 사는 동안 줄곧 고통속에서 땅을 부치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양식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원죄에 대한 결론입니다.
보통은 사람과 여인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았다라는 사실로 원죄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실 조금 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인은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죄였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이 죄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시고, 이들을 제재하십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징벌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대 사회들에 있어서 사실 가장 중요한 축복은 다산과 땅입니다. 땅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의 터전이었습니다. 다산은 확실한 노동력을 의미했고, 땅과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벌은 가장 큰 축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20절에나 가서야 ‘하와’라를 이름을 얻게 됩니다. 하와는 히브리어로 ‘존재한다,’ ‘산다],’생명’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를 그대로 읽으면 아담이 됩니다. 그런데 이 ‘아담’은 사실 ‘땅’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지로 있습니다. 따라서 이 벌과 축복은 흥미롭게도 자신들의 이름과 연결됩니다. 사람(아담)은 그 뜻대로 땅을 일구어 살게 되고, 여인(하와)는 생명을 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과 생명 즉, 가장 큰 두 축복이 부부로서 한 가정을 이루며 살게 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은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과 같아질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사람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가장 큰 축복인 자손으로 연결됩니다. 사람은 노동과 땀을 통해서 자신이 절대로 하느님과 같아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 벌의 결과 역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축복으로 연결되어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으로 주어진 것임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이어서 죄의 발생과 확대에서 살펴볼 부분은 바로 카인과 아벨입니다. 이 둘은 하와의 아들들로 서로 형제였지요.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데서 문제가 발생되게 됩니다. 기쁨의 잔치요 자신들의 노력의 결실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올리는 제사에서 형제들간의 갈등이 발생됩니다.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 카인은 땅의 소출을 아벨은 양떼 가운데에 맏배와 그 굳기름을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보시지 않았다라고 성서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자, 그럼 여기서 새로운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두 형제의 제물을 둘 다 굽어보셨다면 사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서 둘 다 기꺼이 받아주셨다면 인류 최초의 살인이자, 형제간의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또다시 하느님께서 문제가 됩니다.

사실 성서의 구절 안에서는 어느 제물이 더 좋지 않았다라는 판단은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더불어 하느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은 기꺼이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은 기꺼이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걸음 떨어져 생각해보면 하느님께서 두 제물을 항상 기꺼이 받으셔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아벨의 것을 기꺼이 받으셨다가도 다음에는 카인의 것을 기꺼이 받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입장에서는 두 제물을 받으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초점은 카인이 이 상황 속에서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라는 사실입니다.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카인이 분노와 미움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카인을 타이르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카인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으셨다고 해서 카인에 대한 관심을 끊고 계신 것이 아니라, 카인을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계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문제는 항상 ‘나’만 사랑받고, 나만 잘 되지 않으면 그것을 참지 못하는 나의 모습일 것입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4,6)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심리 상태를 잘 아시기에, 카인에게 먼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악과 화를 잘 다스리도록 권고하십니다. 하느님의 당부에 카인은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카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인 들에 나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카인은 하느님께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라고 느꼈을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것이 자신의 동생 아벨 때문일 것이라는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이 분노와 미움이 결국 형제간의 살인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 같은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분노와 화는 점점 커지며 급기야 이 커다란 죄악이 생겨나고 확대되게 됩니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4,9)

자신의 아버지가 받았던 질문(너 어디 있느냐?)과 같은 분위기의 질문이 카인에게도 전해 집니다. 카인은 거짓으로 답변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의 비뚤어진 대답은 죄가 어떻게 발생되고 확대되는지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또한 하느님과 카인의 대화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4,12)

카인에게도 역시 자신의 부모와 같이 죄에 대한 징벌이 내려집니다. 그는 저주를 받아, 아우의 피를 받아낸 땅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땅은 더 이상 그에게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며, 그는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는 그가 가장 큰 축복인 땅에서 분리 됨을 의미하며, 공동체에서 멀어져 고독과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4,13)

카인은 형벌이 너무 크다고 탄원을 드립니다. 히브리어로 형벌은 ‘잘못’과 ‘뉘우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는 뜻과 동시에 ‘제가 지은 잘못은 제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큽니다’라고 중의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형벌 앞에서 두려워하는 중의적 표현을 통해서 성서는 죄 앞에 선 사람의 모습을 드러내 줍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4,15)

하느님의 징벌로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된 카인에게 주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준 것처럼 새로운 약속 즉,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느님께서 항상 카인과 함께 하신다’ 라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서 전반에 걸쳐서 땅의 축복과 자손의 번성과 더불어서 자주 반복되며 드러나는 또 다른 큰 축복은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를 버려두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고통과 고난의 순간에도 당신의 축복과 사랑으로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3~4장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카인이 지은 죄의 발생과 확대가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드러내며, 사람이 지닌 죄의 경향성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과 형제들 간에도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드러내 줍니다. 하느님과 형제를 거슬러 죄를 지을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죄가 어떻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2014-11-11 14:15:12 from 61.42.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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