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과 사랑이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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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장에서 50장의 내용은 요셉의 마지막 이야기로 창세기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탈출기를 준비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의 삶에서 앞의 두 번의 떠남(피딴 아람으로의 도주: 28,1-22,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옴: 31,3-54)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성장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이 마지막 세 번째 떠남은 그의 마지막 여행으로 삶의 마지막 순간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떠남의 1차적인 원인은 대기근과 요셉의 초대에 기인하지만, 이 역시 하느님의 인도하심임을 46장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일이 없습니다. 혹여나 돌아온다면 그 때는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가 될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만나러 이집트로 향하던 중 가나안 땅의 실질적 경계라고 할 수 있는 브엘세바에서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사실 브엘세바는 야곱 가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21,33)과 아버지 이사악(26,23-25)이 하느님을 만나고 축복의 약속을 받은 곳이 바로 브엘세바였습니다. 또한 야곱이 살고 있는 헤브론 골짜기(35,27; 37,14)에서 남쪽으로 약 40 여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이 곳을 넘어서면 이집트까지는 황량한 사막지역이 죽 이어지게 되기에 희생 제사를 드리기에는 더 없이 적합한 지역이 되겠습니다.

지도1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고, 익숙하고 안정적인 곳에 머무르려 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터전을 세 번째로 바꾸어야 하는 야곱에게는 사실 많은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을 겁니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나이와 이집트라는 타국에서의 새로운 생활 앞에 예전과 같은 자신감과 의지가 생기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여러 위험 부담 앞에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 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가 희생 제사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또 한번의 간절한 청함이 야곱의 기도 안에 담기게 됩니다.

“야곱아 야곱아! 이집트로 내려 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반드시 다시 올라오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내려가리라.” (46,2-3)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에게 하셨듯이 바로 당신께서 조상들의 하느님이시자 야곱과 함께 하실 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할아버지의 부르심(22,11)처럼 하느님께서는 두 번에 걸쳐 야곱을 부르시며, 당신께서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시기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토록 그려왔던 아들 요셉이 그의 눈을 감겨 줄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요셉과의 만남과 평안한 삶의 마지막 순간 역시 보증 해 주십니다. 브엘세바에서의 아브라함의 약속(26,24)을 떠올리게 하는 이 약속은 탈출기 1,5-7까지 이어지며, 이집트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득 찼다는 언급처럼 당신의 축복이 이집트 땅에서도 이어짐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는 야곱과 밤에 환시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은, 이 떠남이 요셉의 초대나 혹독한 기근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떠남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안에 이루어지는 섭리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은 아닐지라도, 이집트로의 떠남이 당신과의 약속을 저버림이 아니며, 이집트 땅에서도 당신의 축복과 함께 하심이 이어질 것임을 알려줍니다. 이제 이 떠남은 하느님의 뜻 안에 이루어지는 떠남이자, 당신의 계획과 섭리가 함께 하고 있는 여정이 됩니다.

사실 요셉의 삶에서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나타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었지요. 하지만 야곱에게는 가장 깊은 두려움과 번민에 쌓여있는 순간들에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당신을 체험케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결정적인 하느님의 체험은 분명 감사할 부분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나를 덜 사랑하시거나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하느님이 아니심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만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요셉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요셉은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보고 찾았으며 이를 고백해 왔음에 머물러 보게 됩니다. 각자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이 부자간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느님의 인도하심 안에 이집트로의 여정을 떠납니다. 이어서 야곱의 후손들이 소개되는데 이는 족보에 관심이 많은 사제계 문헌(P)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후손들의 목록에서는 야곱의 자손의 총 수를 칠십 명이라고 이야기 하지요. 이는 탈출기(탈출 1,5)에도 역시 이어지며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노아의 아들인 셈과 함과 야펫의 족보(10,2-29)에서도 우리는 이미 칠십이라는 숫자를 보았습니다. 칠십이라는 숫자는 완전수 7과 10의 곱셈으로 이루어진 수로서 이제 이 자손이 충만(탈출 24,1. 9)해 졌으며, 가족의 숫자를 넘어 하나의 부족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는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간 직계 자손들을 예순여섯 명에 야곱과 요셉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을 합쳐서 총 일흔 명이라고 소개합니다. (46, 26-27; 신명 10,22). 사실 야곱이 이집트로 들어가기 전에도 그의 후손의 총 수는 70명이었지요. 레아가 낳은 자녀가 33명(46,15), 레아의 몸종 질파가 낳은 자녀가 16명(46,18), 라헬의 자녀가 14명(46,22) 그리고 라헬의 몸종 빌하가 낳은 자녀가 7명(46,25)입니다. 그래서 이 자녀의 도합이 70명(33+16+4+7)이었지요.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완벽한 축복을 내려 주셨던 것이지요.

여기에 한가지 흥미 있는 점이 발견됩니다. 후손이 하느님 축복의 큰 축복의 표징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하느님께서 레아와 라헬에게 어떠한 축복을 내려 주셨는지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레아와 라헬 모두 자신들의 여종보다는 후손들이 두 배 더 늘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레아의 종이었던 질파에게서는 열 여섯명의 자손이 있는 반면에 레아의 자손은 서른 세명이나 되었습니다. 라헬의 종이었던 빌하에게는 일곱 명의 자손이 있지만 라헬의 후손은 열 네명이 된 것이지요. 아이 못 낫던 여인이라는 한이 있었던 라헬, 그가 직접 나은 자녀의 숫자는 둘이었지만, 그 후손은 당신의 축복아래에서 그의 몸종의 자손보다는 이미 두배나 많은 열 네명의 자손으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집트 땅에 들어간 자손의 수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숫자 역시 70명을 유지하고 있지요. 자손들 모두가 다 같이 이집트 땅에 들어간 것일까요? 창세기는 새로운 70명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에르와 오난은 이미 가나안 땅에서 죽었고(46,12), 요셉과 요셉의 두 자녀는 이 무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 야곱의 후손의 총수는 65명(70-2-3)이지요. 여기에 야곱의 딸 디나가 포함되어 66명이 됩니다. 앞의 후손의 총수에는 디나가 포함되지 않았었는데, 여기서는 포함 됩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살게 된 야곱의 식구의 총수는 66명에 야곱과 이미 이집트로 이주를 한 요셉과 그의 두 아들이 합쳐져 다시 70명을 이루게 됩니다.
지도2



‘네가 살아있는 것을 보다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46,30)


이제 야곱에게 다시금 극적인 만남의 장면이 펼쳐 집니다.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잃었던 아들, 라헬을 꼭 닮아 눈에서 땔 수 없었던 편애의 아들, 바로 그 아들 요셉과의 만남이 무려 23년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들짐승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깊은 침묵과 슬픔 속에서 아들을 그리워 했던 아버지와 온갖 시련과 고난을 홀로 겪어내며 하느님 안에 살아왔던 아들 요셉간의 감격적인 상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의 떨어짐 이후에 아버지를 만나고 말씀을 듣고 있는 아들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머물러 봅니다.

여기서도 이미 앞서 보았던 바 (창 43,3;8 44:34; 10과 설명 참조)와 같이, 열 한 형제들을 이끄는 역할은 유다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의 내용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49,8-12) 이제는 이 형제들을 이끄는 것은 유다의 몫이 되었습니다. 자연히 아버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도착한 사실을 요셉에게 알리는 것도 유다의 몫(46,28)이 됩니다.

아버지와의 감격적인 상봉을 한 요셉은 격한 감정의 표출보다는 침착하고도 차분하게 아버지와 형제들이 이집트에 잘 정착할 수 있는 준비를 합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가족들을 목축을 하기에 가장 비옥한 지역인 고센 지역에 정착하게 하고 싶었고(45,10) 이를 위해 파라오와 만날 형제들을 철저히 준비시킵니다. 파라오에게 먼저 형제들과 아버지의 식구들이 양떼와 소떼 그리고 모든 재산을 가지고 왔음을 알릴 터이니, 조상들부터 자신들까지 가축을 치는 것이 생업이었음을 알리고, 그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청하라고 이릅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목자들을 역겨워 하니 가족들이 고센 지방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논리라 하겠습니다.

사실 요셉이 이야기하고 있는 목자들에 대한 이집트 사람들의 거부감은 명확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집트 문헌들에서도 이러한 표현은 찾아 볼 수 없고, 이집트 안에서도 목축은 이루어지고 있었고(탈출 9, 20), 파라오와 형제들의 만남에서도 호의 가득한 파라오의 언급(47,6)을 통해서도 그렇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이집트의 다신론 안에서 신성시 되는 동물들도 있었지만(탈출 8,22), 이집트 역시 식용을 위해 가축을 길렀고, 목자들 자체에 대한 거부반응이 컸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단지 이집트의 국경을 침범하고 잠재적인 위험 요소로 생각되던 주변 민족들의 생업이 주로 목축업이었기에 이러한 영향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으나, 이를 결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이집트의 최고 재상이었던 요셉이 형제들이 최고 권력자의 형제라는 상황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씨앗을 막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또한 가족들이 이집트에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님을 밝히며, 목자로서 목초지가 풍부하며 가장 안정적이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장소인 고센(라메세스) 지역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는 목적을 요셉이 큰 그림으로 그리고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요셉은 먼저 파라오에게 자신의 형제들이 가축들과 재산들을 가지고 고센 땅에 와 있음을 먼저 알리고, 형제들 중 다섯을 소개합니다. 파라오의 질문 앞에 형제들은 자신들이 목자임을 밝히며, 명확히 고센 땅에 머무를 수 있기를 청합니다. 이미 머물고 있는 곳도 고센이고, 머물기를 희망하는 곳 역시 고센입니다. 파라오와 요셉과의 신뢰의 관계를 바탕으로 요셉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파라오 역시 형제들을 크게 환대하며, 자신과 왕실의 가축을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으로 화답하며 요셉의 가족들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려 합니다.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요셉은 드디어 자신의 아버지를 파라오에게 소개합니다.

야곱과 파라오의 만남에서 특이한 점은 야곱이 파라오를 두 번이나 축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파라오는 신의 아들이자 신적인 존재였지요. 그런데 자신의 말이 곧 법이 될 수 있는 이 파라오를 야곱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파라오는 요셉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체험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그 하느님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이자, 하느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이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축복을 두 번에 걸쳐 파라오에게 빌어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장면을 통해 세상의 모든 종족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하느님의 약속이 이제 그 후손인 야곱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12,3)

“제가 나그네살이한 햇수는 백삼십 년입니다. 제가 산 햇수는 짧고 불행하였을 뿐 아니라 제 조상들이 나그네살이한 햇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47,9)

나이를 묻는 파라오의 질문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선조들에 비해(아브라함 175세: 창25,7 , 이사악 180세: 창 35,28) 자신이 산 삶이 짧고 불행하였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백 삼십년의 삶이 자신들의 조상들에 비해 짧다는 것도 우리 입장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자신의 삶이 불행했다라는 야곱의 고백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미 9과에서 살핀 바와 같이,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과 장자권, 사랑하는 여인과 많은 자식들, 온갖 부귀 영화를 모두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투신할 수 있는 능력과 끈기와 열정도 있었으며, 또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 이루어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을 잃기는 했었으나, 그것은 사고였던 것이지, 자신 스스로 얻고자 성취하고자 했던 것에서 실패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삶은 과정에 있어서 많은 고통들을 낳았고, 그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였다라고 까지 말하게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야곱을 바로 치시거나 당신 뜻대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야곱만큼이나 끈기 있고 애타게 오랜 기간을 두고 돌보시며 그 축복의 길로 초대하시며 돌보셨음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요셉의 양곡 관리는 점차 심해지는 기근의 상황에서 어떻게 이집트의 토지가 파라오의 것이 되며, 이집트가 파라오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체제로 변화되게 되는지를 전해 줍니다. 파라오의 강력한 왕권이 보장되게 되는 이 과정에서, 요셉이 백성들의 농토의 수용과 더불어 수확의 오분의 일, 즉, 오늘날의 일반적인 유럽의 세율과 비슷한 20% 세금이 형성 되었음을 전합니다. 요셉의 폭정 처럼도 보일 수도 있는 이 장면은, 당대의 비슷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수탈했던 일반적인 주변 국가의 관행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백성들은 호의를 느꼈을 정도로 백성들을 보호하고 위했던 모습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어느덧 야곱이 고센 땅에 머무른 지도 십칠 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이 요셉을 끔찍이 돌보고 사랑했던 시간이 십칠 년이었던 것처럼, 아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고센 땅에서 모셨던 시간 역시 같은 십칠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백 사십 칠세의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의 때가 다가온 것을 알고, 요셉에게 자신을 이집트 땅에 묻지 말고 자신들의 성조들이 묻혀 있는 땅, 곧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 동굴에 안장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마지막 때가 된 것이지요.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 므나쎄와 에프라임을 데리고 갑니다. (48,2) 아버지 야곱은 하느님께서 주셨던 축복의 약속을 되새기며,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의 아들은 열 두 아들이 아니라, 열 네명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순간은, 그러나 뒤에 오는 야곱의 말을 들어보면 짐짓 이해가 됩니다.

“이 아이들 다음에 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너의 아이들이다. 그들은 제 형들의 이름으로 상속 재산을 받을 것이다.” (48,6)

므나세와 에프라임이 임종 직전에 야곱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요셉의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이 상속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한 나라의 재상인 요셉에게 또 요셉의 아들들인 므나세와 에프라임에게 야곱의 재산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양자로 삼아서라도 이들에게 동등한 상속 재산과 자신의 축복을 나누어 주려고 하는 야곱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의 양자 입양은 유대 민족의 혈통에 대한 전통과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서의 족보들은 주로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유대민족은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유대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엄격한 의미로 보면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이방인인 경우에 그 자녀는 유대인이 될 수 없지만, 아버지가 이방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인 경우에는 유대인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요셉은 이집트 사람과 혼인을 하였고, 므나세와 에프라임은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아들들이지만(48,9), 엄격한 관점으로는 유대인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이 이 두 아들들을 양자로 입양하게 되면, 이들은 이제 야곱의 자녀로서 족보에 이름을 올리고, 유대인이 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고대 근동 지역의 대를 잇는 방법에서 친척의 자녀들을 입양하거나, 종을 통해서 아이를 낫고, 그 아이를 입양하는 관례 역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에프라임과 므나세가 아버지 요셉의 형제들과 같이 동등한 지파의 조상이 됨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땅을 배분할 때, 사제 가문으로 땅을 차지 하지 않았던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에프라임과 므나세 지파가 각각 땅을 차지함으로서, 상징적인 열두 지파를 완성함 역시 살펴 볼 수 있겠습니다. (여호 14, 4; 에제 47:13)

요셉은 형제들을 순서대로, 에프라임은 왼쪽으로 므나쎄는 오른쪽으로 가까이 가게 하여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당대의 사람들이 오른손이 더 힘이 세기에, 축복 역시 오른손이 더 크게 받는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서 안에서 오른편은 힘이나 권좌의 강한 힘을 상징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탈 15,6; 사도 2,33) 하지만 이스라엘은 손을 엇갈리게 내밀어 오른손을 작은 아들인 에프라임의 머리에 얹고 맏아들인 므나쎄의 머리에 왼손을 얹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순서가 다른 축복이 요셉의 눈에서는 언짢았기에 요셉은 다시금 아버지께 순서를 바꾸시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시 이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지요.

“아들아, 나도 안다, 나도 알아. 이 아이도 한 겨레를 이루고 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우가 그보다 더 크게 되고, 그의 후손은 많은 민족을 이룰 것이다.” (48,19)

이스라엘은 이제 삶의 마지막 축복을 자신의 바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축복의 순간으로 변화시킵니다. 카인과 아벨(4,4-5), 야곱과 에사오(27,27-29)에서도 반복되었던 것처럼, 하느님의 선택은 에프라임이었습니다. 므나쎄에게도 역시 축복을 내리시고 그 역시 큰 겨레를 이룰 것이었지만, 하느님의 뜻은 에프라임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스라엘 역시 순명하며 자신의 마지막 축복을 전합니다.

왜 하느님의 뜻은 특정인에게 더 기우는가? 왜 공평치 않으신가? 하는 질문 역시 제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조들의 삶에서도 드러났듯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다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특정인을 선택하셨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서 관심을 끊거나 축복을 거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축복을 내리시고,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모두에게 차고 넘치도록 베푸시고 계심에 다시금 머물러 봅니다. 이미 충분한 축복과 선물이 있는데도 자신만이 항상 모든 것을 더 가지려 하며, 공평치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받는 사람의 마음가짐의 문제요, 시기와 질투의 마음은 아닐런지요?
‘하느님께서 너를 에프라임과 므나쎄처럼 만들어 주시리라.’ (48,20)는 이스라엘 백성의 축복의 말은 이러한 성격을 더욱 명확히 밝혀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이미 풍성하고도 충만하게 받고 있음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감사임을 다시금 새겨 봅니다.

“자, 나는 이제 죽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와 함께 계시면서, 너희를 다시 조상들의 땅으로 데려가 주실 것이다.” (48,21)

이스라엘은 앞으로의 백성들의 운명, 즉,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며, 다시금 조상들의 땅으로 데려가 주실 것이라는 탈출기의 예언으로 이 축복을 마무리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데로, 당신께서 주시는 땅으로 돌아가는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열 두 아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축복을 줍니다. 이 세부 설명들은 매우 긴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민족이 형성됨을 기억하게 합니다. 사실 내용상으로 보면 모든 형제들이 축복을 받고 있지는 않기에 이 제목이 꼭 적합치는 않지만 이 부분이 야곱의 형제들에 대한 마지막 축복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이를 야곱의 축복이라 부릅니다.

형제들의 순서에 따라 보면 열 두 형제 중에 맏이는 루우벤이고 루우벤은 이미 장자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장자의 역할을 맡을 이는 형제들의 순서에 따르면 시메온이었고, 그 다음은 레위가 됩니다. 하지만 야곱 가족을 이끌고 있는 이는 유다 입니다. 이 마지막 축복의 내용을 살펴보면 왜 유다가 형제들의 맏이 역할을 하게 되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또한 축복의 내용들은 훗날 이스라엘 각 지파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설명하는 예언적 성격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르우벤은 맏이로서 영광이 넘치고 힘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가 아버지의 소실 빌하와 동침하며(35,22) 아버지의 침상을 더렵혔기에, 노아와 그의 아들 가나안의 예에서처럼(9,25-26) 이 죄로 인해 자신의 축복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시메온과 레위의 칼은 폭행의 도구로 표현되며, 그들은 격분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멋대로 소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는 시메온과 레위가 자신들의 동생 디나가 겁탈 당한 것에 분개하여 스켐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양과 염소, 소와 당나귀를 약탈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34,25-26)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은 평생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복수를 위해 자신의 가족을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었지요. 이들의 잔악한 분노는 결국 저주를 받게 되고, 시메온 지파는 유다 지파에 흡수되는 역사로, 레위 지파는 나중에 사제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기는 하지만, 지파들의 땅의 나눔에서는 자신들의 땅을 조금도 얻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결국 이 형제들을 이끄는 몫은 유다의 몫이 됩니다.

유다에 대한 축복은 내용상으로는 세 부분(8 형제들의 맏이가 될 유다, 9 어린사자 유다, 10-12 왕으로의 유다)으로 나누어지며, 긴 축복의 부분을 담당합니다. 다른 형제들은 그를 찬양하며, 그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다윗 왕으로 대표되는 유다 지파의 후손은 메시아 사상과도 연결되어 하느님의 축복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와 축복의 표징들로 제시 됩니다. 어린 사자, 왕 홀, 지휘봉은 모두 왕권과 영광을 상징하는 표현들이고, 포도나무와 포도주, 포도 줄기, 포도주로 옷을 빨 수 있는 상황은 메시아 시대의 풍성함과 축복, 번영과 풍요로움을 이야기 합니다. 검은 눈과 우유보다 흰 이는 주님의 축복 안에 이루어지는 건강함과 빼어남을 뜻합니다. 어린 나귀는 겸손한 메시아께서 타고 오실 동물로서 제시되며,(즈카 9,9; 마태 21,5) 이 축복의 내용은 지금까지의 유다의 역할 뿐 아니라, 후대의 메시아 사상이 바로 유다 지파, 즉, 다윗 가문으로 이어지게 될 것임을 미리 예언하는 축복으로 연결 됩니다.

요셉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에 대한 축복은 지리적인 지시나 식물이나 동물의 상징을 통해서 제시되며, 각 지파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카르를 제외하면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들이 서술되고 있으며, 튼튼한 나귀인 이사카르는 힘은 세지만 지혜롭지 못하여 가나안에게 강제노역을 당하게 되는 역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었고, 두 아들 에프라임과 므나쎄는 후대에 북 이스라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따라서 요셉에 대한 축복은 가장 긴 부분을 할애하며 열매 많은 나무 샘가에 심어진 열매 많은 나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의 환경에서 열매 많은 나무들이 즐비한 샘가라는 환경은 익숙한 환경이 아닙니다. 오히려 척박한 환경이나 광야가 익숙하지요. 따라서 시냇가에 심어진 열매 많은 나무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의 표상이나 축복의 모습으로 사용됨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3; 예레 17,8) 활과 싸움에 대한 표상은 요셉 지파가 여러 민족에서의 침입에서 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되며, 하느님께서 이 지파와 함께 하며 지켜주셨기 때문이며, 이 승리가 바로 하느님의 도움 안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땅과 후손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 역시 요셉에게 지속될 것임을 드러내 줍니다.(25-26)

마지막으로 벤야민 지파는 아침에는 움켜진 것을 먹고 저녁에는 잡은 것을 나누는 약탈하는 이리로 표현되며, 그들의 용맹함과 힘을 표현하며 열두 지파에 대한 축복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서 안에서 일반적으로 이리는 양들을 습격하는 약탈자의 이미지로 부정적으로 표현되나(예레 5,6; 에제 22,27; 마태 7,15; 10,16) 유일하게 이곳에서는 축복의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축복 말씀의 중심은 하느님께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당신 안에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축복도 지속되고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지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행동들을 통해서 축복을 받지 못하고, 역사 안에서 다른 지파에 흡수되거나 몰락하는 상황들을 이야기 하며, 각 지파의 역사 안의 특성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야곱의 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사악과 레베카가 묻혀있는 가나안 땅 마므레 맞은쪽 막펠라 동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끝으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거금을 들여 구입한 가족들이 소유한 첫 땅이자, 유일한 땅이었던 이 동굴에 선조들과 함께 묻히는 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됩니다.

야곱이 생을 마칠 때 그의 나이는 147세 였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고, 아버지 이사악은 180년을 살았지요. 그런데 이 삶의 햇수가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은 (5×5)×7=175, 이사악은 (6×6)×5=180, 야곱은 (7×7)×3=175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야곱으로 오면서 앞의 숫자는 하나씩 늘어나고(5-6-7) 뒤의 숫자는 둘씩 줄어드는 형태(7-5-3)를 띄며 이 세 숫자를 합치면 완전수인 17(완전수 7+10)의 형태를 띄게 됩니다. 유대의 신학자들은 이 숫자들의 의미를 아브라함-야곱-이사악이 모두 하느님의 뜻 안에서 충분히 축복의 삶을 살았음이 이러한 충만함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하며,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음을 전합니다.

야곱의 장례는 이집트의 전통 방식을 따라 거행 됩니다. 이는 이집트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이집트에서 막펠라 동굴까지의 긴 여정 동안 사막의 고온에서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0일간의 방부처리(미이라)가 이루어집니다. 요셉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이집트의 고관들과 백성들 역시 함께 모여 애도하며 70일동안 곡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죽음에 72일간의 애도의 기간을 가졌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야곱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태도는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며 애도 기간을 가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직책상 그가 장례를 치르러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는 것은 파라오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지요. 요셉은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을 미리 파놓는 당대의 풍습을 이용해, 아버지가 가나안 땅에 자신의 무덤을 파 놓았고, 그곳에 안장하라는 유언을 하였으며 자신은 이를 맹세했음을 설명하며 허락을 청합니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고센 지방에 정착하게 했던 요셉의 치밀함을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에 대한 파라오의 신뢰 안에서 충분히 허락될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파라오로서는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청함임을 생각해 봅니다.
이제 요셉의 온 집안과 형제들, 집안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파라오의 모든 신하들과 원로들과 병거와 기병까지 함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장엄한 행렬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들은 고렌 아탓에 이르러 장엄하게 호곡합니다. 사실 모세와 아론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애도 기간은 30일(신명 34,8; 민수 20,29) 이었고,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던 사울을 위해서 백성들이 가졌던 애도 기간은 7일(1사무 31,13)이었습니다. 요셉 역시 여기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애도 기간을 따라 이레 동안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애도합니다. 가나안족의 눈에 보기에도 장엄한 애도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고렌 아탓(아탓의 타작 마당)이라는 장소는 아벨 미츠라임(이집트의 시냇물)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아벨(אָבֵ֣ל:시냇물)이라는 단어와 에벨(אֵבֶל:애도)라는 단어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기에 표현되는 언어유희라 하겠습니다.

지도3



그런데 여기에 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고렌 아탓 즉, 아벨 미츠라임이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사실 이집트에서 마므레의 막펠라 동굴로 가려면 요르단 강까지 갈 필요도, 건널 필요도 없습니다. 이는 상당히 돌아가는 길이 됩니다. 당대에는 이러한 우회로가 일반적인 길이었을까요? 이는 창세기에서 지속적으로 보았던 것처럼, 요르단 강 건너편의 장엄한 애도에 대한 전승과 막펠라 동굴에 대한 다른 두 전승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승적인 편집을 뒤로 하고서도, 창세기의 마지막 장이 탈출기를 준비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지나는 길이 가장 가까운데도 갈대 바다로 이르는 광야의 길로 인도하셨던 탈출 사건을 기억하게 하며(탈출 13,17-18), 큰 여정의 관점으로는 요셉 일행의 여정이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해 가나안으로 나아가는 약속의 여정을 미리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일행은 이제 이집트로 다시금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형제들은 크나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요셉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야 부자 지간의 예 때문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형제들에게 앙갚음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지요. 앙심을 품고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죽이려 했던 에사우의 모습(27,41)을 기억해 보더라도 이는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함께 생활한지도 1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형들은 아직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요셉이 가지고 있는 지위와 힘을 볼 때, 이는 충분히 가질만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도 환대와 기쁨으로 대하는 에사우를 만났음에도, 에사우에 대한 기억과 두려움 속에서 형과 함께 살기는 어려웠음을 되새겨 보면(33,12-17), 형제들의 반응도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부탁했던 용서(50,17)를 상기시키며, 당신 아버지의 하느님의 종들인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형제들은 두려움 속에서 요셉 앞에 직접 나서지도 못하고, 자신들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 야곱을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당신의 아버지라고 청하면서 간절한 용서를 청합니다. 다른 사람과 달리 뗄레야 뗄 수 없는 가족이기에 사실은 더 어렵고, 한번 갈라진 부분들을 회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하며 용서를 청하는 형제들의 전갈을 들으며, 요셉은 울음을 터뜨립니다. 요셉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Waltke(Bruce K)는 이를 형들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나면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지 모른 다는 불안함 속에서 살아온 형들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눈물을 흘렸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요셉은 하느님 안에 살아갔던 신앙인이었음에도, 자신의 삶의 순간들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었지요. 그 불안감과 고통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요셉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두려움 속에 사람을 보내어 용서를 청했던 형제들은 눈물을 흘렸던 요셉 앞에 엎드려 자신들을 종(50,18) 이라 청하며 다시금 용서를 청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있어서 지난 시간은 이미 하느님 만남의 시간이었고, 그 이끄심과 체험을 바라보았던 시간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50,19-21)

요셉은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합니다. 이미 그들의 마음과 그 삶의 시간을 공감하고 있으며,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뜻을 보고 체험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의 고통들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보았으며 체험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반복해서 드러난 것처럼, 이는 그의 삶의 고백이자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에게 형제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크나큰 충격과 노예로서의 고통과 어려움의 원인 제공은 분명 형제들(50,20)이었습니다. 일반적 경우에 이러한 충격과 상처를 받고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을 원망하고 자신의 상처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과 어려움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았으며, 당신의 도움 안에서 자신의 상처와 아픔에서 자유로워 졌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원인 제공자들에 대한 원망에만 머무르며, 자신 스스로도 자신을 자책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삶의 충실과 기도 안에서 당신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악들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시고, 축복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이 그를 더 이상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만 머물지 않게 하고 오히려 더 큰 뜻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에 동참하며, 자신 역시 그 축복에 동참한 사람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이러한 치유와 자유로움은 오히려 형제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나타나며, 형제들을 위로하고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와 사랑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요셉과 같은 시선과 주님의 도우심을 그와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청해 봅니다.

이제 요셉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하느님의 축복속에 충분히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 요셉의 삶에는 이 축복의 시간이 어떻게 표현되었을까요? 요셉은 110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집트의 재상이었던 요셉의 삶 110년은 사실 이집트인들이 생각했던 가장 이상적이고 축복받은 삶의 시간이였다는 사실입니다. (ANET: 414) 하느님의 사람이었던 요셉은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때도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110이라는 숫자 역시 완전수 10×10+10=110의 조합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모세의 뒤를 이어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었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 역시 110년(여호24,29)을 살았다는 사실은, 이 시간이 하느님의 축복안의 충만한 삶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 (50,24-25)

요셉의 마지막 유언은 야곱의 그것처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어, 약속한 바로 그 땅으로 올라갈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처럼 바로 조상들의 무덤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시금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실 때, 자신도 함께 올라갈 것임을 예언하고, 자손들의 맹세를 받습니다. 실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맹세에 따라 이집트 탈출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오며(탈출 13,19), 이스라엘 백성의 40여년의 광야생활에 함께 동행하다가 마침내 그 약속이 성취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묻히게 됩니다.(여호 24,32) 이로써 창세기 이야기는 마무리되며 동시에 자연스럽게 탈출기의 시작을 준비시켜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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