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과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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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과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2) (42,1-45,28)

요셉이 예언한 대로 이집트 땅에 칠 년간의 대풍이 있었고 이제 칠년간의 기근이 시작됩니다.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였지만 이집트는 이미 대비를 하였기에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주변의 민족들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에 와서 곡식을 살 수 밖에 없고, 가나안 땅에 사는 주민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41,53-47)

“어째서 서로 쳐다보고만 있느냐? 내가 들으니 이집트에는 곡식이 있다는구나. 그러니 그곳으로 내려가 곡식을 사 오너라. 그래야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다.” (42,1-2)

야곱은 아들들에게 이집트에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명합니다. 대기근 속에서 온 가족이 다 굶어 죽을 위험에 처했기에 양식을 사러 보내는 야곱의 행동은 가장의 현명한 판단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 라헬이 낳은 유일하게 남은 혈육 벤야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습니다. 요셉과 같이 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더불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아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기 위해 이집트에 도착합니다. 이집트의 통치자 앞에서 형제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지요.(42,6) 어린 요셉이 꾸었던 첫번째 꿈(37,7) 즉, 형제들 모두가 요셉 앞에 엎드려 절을 하는 꿈이 드디어 실현되었습니다. 요셉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형들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요셉은 형들을 단번에 알아보는데 왜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형제들은 통치자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했기에 당연히 요셉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요셉의 얼굴을 보았더라도 이집트의 화려한 복식과 금으로 치장했으며 당시의 이집트 남자들처럼 턱수염도 없는 요셉의 얼굴을 보고 바로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집트의 재상이라니요. 내 자신이 상상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을 때, 우리 자신이 보는 것 역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음을 되새겨 봅니다. 형제들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허황된 꿈이라 여겨졌던 꿈이 실현되기까지 요셉에게도 또 형제들에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셉도 더 이상 어릴적 꿈쟁이 요셉이 아니고, 형들도 더 이상 이전의 형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요셉은 매몰차게 형제들을 몰아붙입니다.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너희는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

이집트의 통치자가 가나안의 이방인들을 염탐꾼들로 세 번이나 매몰차게 몰아붙입니다. 요셉이 과거의 형제들에 대한 앙심을 권력을 이용해서 되갚아 주고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양식을 구하려 왔던 형제들은 이제 간첩으로 몰려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가족들에 대해서 낱낱이 캐묻고(43, 7), 당황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가족사를 줄줄이 설명합니다. 본디 한 아버지의 열두 아들들로서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한 아우는 없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없어진 아우가 바로 요셉이지요. 구덩이 사건(37,24, 27, 28)을 기억해 보면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 넘기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없어졌었으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겠습니다. 이 질문은 결과적으로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과거의 잊었던 죄악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 너희 막내아우가 이리로 오지 않으면, 내가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건대, 너희는 결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42,14-15)

그런데 이 설명이 더 큰 화를 불러옵니다. 막내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형제들 모두가 결코 이집트 땅을 떠날 수 없다고 즉 죽을 것(42,20)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더군다나 파라오의 생명을 건다는 이집트의 관용적 표현을 통해 통치자가 공적으로 이야기 했으니 이제 벗어날 구멍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 막내 없는 아버지의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결코 벤야민을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형제들은 압니다. 그렇다고 벤야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형제들 모두가 죽게 생겼습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양식을 사러 왔지만, 양식은 얻지도 못하고 모두가 죽음을 맞게 생겼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을 구덩이(옥)에 가둡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형제들에게 이 구덩이에서의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요셉이 두 번에 걸쳐 구덩이에 내려갔던 것 처럼(37,24; 39,20) 형제들 역시 구덩이로 내려갑니다. 죽음 앞에서의 상황, 사흘이라는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시간이 흐른 후 요셉은 다시금 형제들을 만납니다.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매몰찼던 요셉이 조금은 부드러워 졌으며, 자신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의미는 이방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이해해 볼 수 있지만, 이들에게 이 말이 들릴 리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위협속의 삼일 간의 옥살이는 이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올바로 돌아볼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바라봅니다. 공통의 죄, 그 죗값을 하느님께서 치르게 하신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요셉은 이를 못 알아듣는 척 하며 묵묵히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물러나와 눈물을 흘립니다.
분명 요셉은 첫째 아들 므나쎄의 뜻처럼 자신의 과거와 아픔은 잊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용서는 이들이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형제들이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고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 회개의 준비와 용서의 준비가 바로 요셉의 시험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눈물도 단순한 감상의 눈물이 아닌 바로 이 용서와 화해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요셉은 맏이 르우벤이 아닌 레아의 둘째 아들 시메온을 불러내어 그를 묶습니다. 르우벤은 맏이로서 형제들을 이끌고 다른 가족들의 삶을 책임져야 했고, 또 그가 어린 요셉을 구하려 했던 사실을 이제 요셉이 알았기에 그의 선택은 시메온이 되었을 겁니다. 사실 시메온은 세켐의 남자들을 다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그가 형제들을 대신하는 볼모가 됩니다. 그의 목숨은 이제 벤야민에 달려 있게 됩니다.
요셉은 포대에 밀을 채우고 각자의 자루에 곡식의 값 역시 도로 넣게 합니다. 이는 형제들이 이 돈을 어떻게 하나를 보기 위한 시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제들과 가족들을 사랑하는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는 이 호의(43,23)가 깊은 혼란과 두려움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하룻길을 걸어 형제들 중 하나가 그 곡식자루에 자신의 돈이 있는 것을 보자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가?” (42,28)라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제 이 형제들의 길에 하느님께 대한 고백이 함께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던 이 여정에서 형제들은 비록 두려워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신앙을 고백 합니다. 염탐꾼에다 도둑으로도 몰릴 수 있으며 시메온을 구해오기는 더 어려워진 이 사건 앞에서 형제들은 바로 이집트로 돌아가서 해명하지는 않습니다. 굶주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 시급한 문제였을 것이고, 이들이 이집트로 돌아 갈 때에는 막내 벤야민을 데리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그 동안의 일들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각자 자루의 곡식을 꺼내는데 각 자루에 자신들의 돈주머니가 그대로 들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형제들과 아버지는 이 돈주머니들을 보고 또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아버지는 절망스럽게 외칩니다.

“너희가 내게서 자식들을 빼앗아 가는구나! 요셉이 없어졌고 시메온도 없어졌는데, 이제 벤야민마저 데려가려 하는구나.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들이닥치다니!”

야곱은 한 순간에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합니다. 이제 요셉과 시메온에 이어 벤야민까지 잃게 생겼습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면 사기꾼에 염탐꾼으로서 목숨을 부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 맏형인 루우벤이 참으로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만일 벤야민을 아버지께 데려오지 않으면, 제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 손에 맡겨 주십시오. 제가 아버지께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42,37)

야곱에게 루우벤의 두 아들을 죽이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아들도 그의 아들 벤야민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또 세상에 어느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주들을 죽이겠습니까? 루우벤의 결의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그 어떤 해결책도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을 더 단단히 묶어놓을 뿐이었습니다. 야곱은 “내 아들”(벤야민)은 “너희”(다른 형제들)와 함께 갈 수 없다라고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한결같은 그의 편애는 내 아들이 죽으면 나도 죽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마무리 됩니다. 정황상 벤야민이 내려가면 그 역시 죽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있는 야곱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유예하며 피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볼 수 있겠습니다.

야속하게도 기근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 기근은 7년간 지속될 것이고 이제 겨우 2년차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이집트에서 사온 양식도 다 떨어졌고 다시금 가족들은 굶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43,3)

그러자 이제 형제들의 맏이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가 대답을 합니다. 일반적 상황이었으면 형제들을 대표해서 답변하고 통솔하는 것은 맏형 르우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유다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야곱의 유언과 축복(49,8-12)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왕국은 유다 지파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고, 구약의 예언에 따라 예수님 역시도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셨음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유다는 아버지에게 벤야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양식을 다시 사올 수 없음을 차분히 설명합니다. 통치자는 가족에 대해서 낱낱이 캐물었으며 현재의 상황은 벤야민을 데리고 가야만 하는 상황임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머뭇거리지 않았으면 벌써 두 번이나 다녀올 시간이 지났음을, 아버지와 형제들 뿐만 아니라 손주들 역시 굶어 죽을 위험에 처했음을 전하며 아버지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저에게 책임을 물으십시오. 제가 만일 그 아이를 아버지께 도로 데려와 아버지 앞에 세우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지에 대한 그 죄를 평생 동안 짊어지겠습니다.” (43,9)

43장에서는 야곱의 이름이 다시금 신앙의 이름인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는 성서 본문의 문헌적인 변화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움켜쥐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야곱이 이제 자신과 벤야민의 운명을 하느님의 주권에 맡기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아버지 이스라엘에게는 사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늦추면 가족들과 손주들도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 앞에서 유다는 앞으로의 모든 일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음을,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평생 동안 아버지 앞에서 그 죄를 지고 갈 것임을 말씀 드립니다.

“너희가 그 사람 앞에 섰을 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 사람이 너희의 다른 형제와 벤야민을 보내 주기를 바란다.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43,14)

이스라엘은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벤야민을 보냅니다. 가나안 지역의 특산물을 준비 시키고 자루에 들었던 돈과 더불어 두 배의 돈을 챙기도록 해서 더 이상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방비시키는 모습은 야곱의 평소 모습입니다. 너희의 다른 형제(시메온)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이 순간까지도 그의 편애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고백은 단순한 체념을 넘어서 전능하신 분의 호의를 청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나이 든 자신은 차지 하더라도, 손주들과 다른 식구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들 벤야민을 보내야만 합니다. 자신의 삶의 존재 이유였던 라헬의 유일한 피붙이를 잃을 수도 있는 순간, 생명의 주관자는 주님 한 분뿐이시며, 그가 의지할 것은 하느님의 자비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아버지 이스라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벤야민과 형제들이 길을 떠나 이집트에 도착하자, 이들은 곧바로 요셉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요셉의 집으로 가는 길은 형제들에게는 다시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길입니다. 곡식 자루에 들어있었던 돈으로 인해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 합니다. 관리인에게 지난번 일을 상세히 설명하며 이는 자신들이 한 행동이 아님을, 누가 그 돈을 자루에 넣었는지 자신들은 모른다고 고백하며 이를 무마해 보려 하지만, 그럼에도 두려움과 불안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느님, 여러분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그 곡식 자루에 보물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돈을 이미 받았습니다.”

사실 이 대답은 관리인의 대답이 아닙니다. 요셉의 대답이지요. 관리인을 통한 요셉의 대답은 여러분의 하느님, 여러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곡식 자루에 보물을 넣어 주신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형제들은 처음 곡식 자루의 돈을 보고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가?” (42,28) 하며 두려움의 질문을 던졌고,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행하신 은총으로 그 답이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형제들은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형제 시메온이 돌아오고, 발씻을 물의 호의가 주어지며, 함께 식사를 한다는 소식에도 자신들을 매몰차게 심문하며, 시메온을 인질로 삼는 것도 모자라, 막내까지 데려 오라 했던 이 통치자의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 이 여정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는 표징들은 차곡차곡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식사를 하러 들어오자 형제들은 다시금 땅에 엎드려 절 합니다. 아버지의 안부를 물은 요셉은 눈을 들어 자신의 친동생 벤야민을 바라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산을 보고 양을 보았던 것 처럼(22,4; 13), 요셉은 눈을 들어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자신의 친동생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뜻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얘야, 하느님께서 너를 어여삐 여겨 주시기를 빈다.”

‘애야’라는 표현은 직역해 보면 ‘나의 아들아’(22,7,8;27,1;27,13)가 됩니다. 아직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요셉이 벤야민을 부르는 이 애정 어린 연민의 호칭과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요셉의 마음에 머물러 볼 수 있겠습니다. 서로간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십 삼년의 고난의 시기와 재상으로서 7년의 풍년과 두 번째 흉년(45,6)을 지내며 이십 이년 만에야 만나게 된 아우는 그를 참으로 벅차게 했고 눈물 짓게 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나이 순서로 앉히고 벤야민의 몫은 다섯 배나 더 많이 준비해 줍니다. 형제들을 나이순대로 앉힌 것도 그렇고, 과분한 호의를 베푸는 것도 그렇고 기쁨의 축제 속에서도 무언지 모를 불안감에 쌓여있는 형제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겠습니다.

이튿날 형제들은 곡식을 가득 싣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을 향합니다. 불안감들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걱정했던 곡식 값에 대한 오해는 풀렸고, 시메온도 무사히 돌아왔으며, 막내 벤야민도 융숭한 대접을 받고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배고픔에 허덕이는 가족들에게 줄 충분한 곡식도 채웠고 기쁨의 귀향길에 오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리인이 쫓아와서는 점을 치는 은잔이 없어졌다며 선을 악으로 갚는 고약한 이들이라고 호통을 칩니다. 이미 지난번에도 그리 두려워 하며 어렵게 오해를 풀었는데, 형제들은 그런 악한 일을 행했을 리가 없습니다.

“저희가 어찌 나리의 주인댁에서 은이나 금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나리의 이 종들 가운데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나리의 종이 되겠습니다.”(44,7-9)

그리 호언장담을 했건만, 은잔이 하필이면 벤야민의 자루에서 나오고 맙니다. 하느님도 참 너무하십니다. 이 명백한 증거 앞에서 자신들의 깊은 마음의 고통을 의미하는 옷을 찢으며 괴로워 한다고 해서 변화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옷을 찢는 또 다른 의미는 장례 예식임을 생각해 보면 불안한 상황 전개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벤야민은 이집트 법에 따라 목숨이 위태로워 졌습니다. 벤야민 뿐만 아니라 형제들도 종살이를 하게 생겼습니다. 식량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은 이제 기아 속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저희가 나리께 무어라 아뢰겠습니까?(…)무어라 변명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종들의 죄를 밝혀내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나리의 종입니다. 저희도, 잔이 나온 아이도 그러합니다.”

이는 사실 요셉의 또 다른 잔혹한 시험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위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또 이십 이년의 시간 동안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요셉의 계획이었습니다. 요셉은 잔이 나온 벤야민만 자신의 종이 되고 다른 형제들은 평안히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라며 마지막 수를 던집니다. 아버지의 사랑만을 독차지 하고 자랐던 벤야민을 아직도 시기하고 있다면, 그가 행한 죄값은 자신이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평안히들 아버지에께로 올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을 대표하는 유다는 이 모든 일들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바라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죄, 즉, 요셉과 관련된 죄를 밝혀 내셨다고 고백합니다. 첫번째 자루의 돈의 경우처럼, 두번째 은 잔의 경우도 이 모든 것을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더 이상 편애에 대한 증오와 시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늙은 아버지의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지켜드리고 싶은 아들들이자, 변화된 형제들의 모습입니다.

“이제 이 종이 저 아이 대신 나리의 종으로 여기에 머무르고, 저 아이는 형들과 함께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44,33)

다른 형제들을 대신해 유다는 매우 감동적이고도 설득적인 어조로 요셉에게 호소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 바로 벤야민이며, 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 깊기에 아들이 없어진다면 아버지는 비통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 것이라며, 아버지의 비통을 차마 볼 수 없는 자신의 괴로움을 고백합니다. 더불어 유다 자신이 그 아이 대신 종으로 남을 수 있게 해 달라며 간절히 청하지요. 이 청원이 탈출기의 파스카 어린 양이나 예언서의 고통 받는 야훼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대속 개념을 직접적으로 담아내고 있지는 않으나, 자신이 대신 그 죗값을 짊어지고 다른 이를 자유롭게 하는 대속의 개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평생 동안 죄를 짊어지겠다는 자신의 약조에 대한 유다의 구체적 실천임과 동시에, 이 모든 일들이 하느님께서 과거의 자신의 죄를 밝히신 것이기에, 그 죄값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그의 고백이 함께 있다 하겠습니다. 유다의 고백을 들은 요셉은 형제들 외에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목놓아 울며 외칩니다.

“내가 요셉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실 앞에 어리둥절해 있는 형제들! 사실 이 통치자가 진정 요셉이라면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러한 형제들의 두려움은 아버지 이스라엘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이 적개심을 품고 자신들의 악행을 되갚을까 두려워 하는 모습(50,15)으로 들어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큰 죄의 굴레였고 막연한 불안감이 항상 괴롭히고 있는 풀리지 않는 부담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 이십 이년의 시간은 하느님의 뜻을 보고 찾고 들으며, 깊은 신앙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의 시간은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하였고, 그는 하느님의 섭리와 이끄심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의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45,5; 7-8)

요셉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인정하고 고백했던 형제들 앞에서, 그 죄 때문에 자책하거나 자신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고해성사에 대해 설명하시며, 고해 성사에서 자신의 죄를 잘 바라보고 인정하며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을 자책하거나 비하하고 있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라고 초대하시는 것과 같이, 요셉은 이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기에 괴로워 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하고 경험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요. 이집트라는 머나먼 타지에 오게 된 것은 형제들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임을, 구원의 민족을 세우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임을 이야기 합니다.
요셉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당신 구원의 길로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이끄심과 하느님 만남의 체험을 통해 그 깊은 섭리를 체험하고 고백하며 형제들을 용서하는 요셉의 모습을 만나 볼 수 있겠습니다.
벤야민과 요셉은 서로 껴안고 부둥켜 웁니다. 이십 이년만의 감동적인 상봉의 장면이겠습니다. 자신들의 죄악은 고백했지만, 아직도 내심 두려운 형제들은 요셉이 한 사람 한 사람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린 후에야 요셉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이 화해와 용서의 순간에 과거의 고통과 아픔에서 가장 자유로워진 사람, 그 설움과 충격과 상처에서 가장 큰 사랑의 치유를 받은 사람은 다름아닌 용서를 한 요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파라오는 이들에게 이집트의 가장 좋은 땅과 기름진 먹거리를 약속합니다. 이집트 온 땅의 온갖 좋은 것이 이들 것이 됩니다. 형제들 모두에게는 축제와 잔치에 참여할 때의 일반적인 복식인 예복이 주어지고, 특별히 벤야민에게는 은전 삼백 닢과 예복 다섯 벌이 주어 집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은잔이나 은전 삼백 닢은 은전 스무닢에 팔려갔던 요셉의 과거를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더 이상 형제들은 이전의 형제들이 아닙니다. 벤야민과 형제들의 대우가 다르다고 해서 이를 시기할 형제들이 아닙니다. 이미 유다의 호소에서도 형제들 사이의 공동체적 모습은 절절히 드러났습니다. 벤야민에 대한 요셉의 특별한 대우도, 아버지의 벤야민을 향한 편애도 이제 더이상 형제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혹여나 형제들에게 분란이 일까봐 흥분하지 말라는 요셉의 당부도 이제는 기우에 불과합니다.

벤야민 마저 잃을까봐 깊은 시름에 잠겨 전전긍긍하고 있던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으며 이집트의 통치자라는 이야기는 전혀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 비유의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야곱 역시 벤야민의 무사 귀환만을 기도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모셔가기 위해 보낸 수레들을 보고 그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내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니, 이제 여한이 없구나!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 아이를 봐야겠다.”

이제 아버지 이스라엘은 벤야민 없이 저승길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벤야민 뿐 아니라 죽었다고 생각했던 또 다른 잃었던 아들 요셉 역시 찾게 됩니다. 죽은 것과 같았던 야곱의 삶이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으며, 벤야민과 더불어 자신의 아들 요셉을 보고자 하는 갈망속에 새로운 생명을 되찾습니다.

11과를 마무리 하면서 요셉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는 예형론(Typological Method)의 방법론을 조금 설명 드릴까 합니다.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구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인데, 요셉의 모습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 되겠습니다. 사실 신약 성서 안에서 직접 요셉의 모습을 인용해서 보고하고 있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도 7,9-14; 히브 11,22) 하지만 요셉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고 묵상할 부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요셉에게도 예수님께도 공적인 활동을 하기까지는 3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요셉도 예수님께도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엄격한 의미로 팔려간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요셉은 은전 스무 닢 예수님은 은전 서른 닢이라는 돈을 받은 거래가 성립되었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 팔려감은 민족과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응답하는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죽음을 통하여,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는 시련을 통하여 멸시와 고통의 상황에서 민족과 백성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게 됩니다.

요셉도 예수님도 아버지에게서는 깊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들의 형제들, 혈족들에게서는 환영 받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환영을 받고 메시아로 또 구원자로서 이들을 축복하고 생명의 빵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자신을 환영하지 않았던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사랑하였으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며 용서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며 (창 45,5; 사도 2,24), 이를 통해 인간의 악행조차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선함과 은총을 드러냅니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드러내준다는 예형론의 설명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세례를 통해서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모습 앞에서 악함을 선함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누구보다 더 깊은 사랑의 섭리로 우리를 은총의 길로 초대해 주시는 당신의 모습 앞에 머물러 봅니다.

2016-04-26 17:49:26 from 115.95.9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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