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과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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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과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나그네살이하던 땅 곧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았다.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창 37.1-2)

37장은 야곱의 역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미 36장에서 에사우와 에돔의 이야기를 전하며 야곱의 이야기는 마무리 된 것처럼 보였는데, 다시금 야곱의 역사 이야기로 돌아온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야곱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의 역사는 이러하다. 창 25,19) 이사악의 역사(25,19-35,29)를 전면에 내세우며 실지로는 야곱의 이야기를 전했던 구조가 역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지요.

단순히 야곱의 역사 이야기를 하려면 열두 아들의 이야기(창 35,23-26)가 소개되는 것이 더 적합 할 것 같은데, 곧바로 요셉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는 창세기의 관심이 야곱의 열두 아들(지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요셉”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창세기의 마지막 성조로 요셉이 등장합니다.

요셉 이야기의 시작은 유년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앞으로의 요셉 이야기에 있어 중요한 실마리가 될 요셉은 어떤 아이였을까요? 열 일곱살 요셉은 형들과 같이 양을 치는 목자였지만, 다른 아들들을 도와주는 심부름 꾼이자, 그들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일러바치는 아이로 등장합니다. (창 37,2) 고자질쟁이 요셉을 떠올려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요셉에 대해서 어떠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거나 비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요셉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 볼 부분이 있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형들이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동생은 아니겠습니다.

37장에서는 앞으로의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들이 제시 되는데 바로 옷과 꿈이 되겠습니다. 이는 요셉의 삶을 이끄는 핵심 단어들이 됩니다. 옷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신분이나 힘이나 권력을 의미합니다. 꿈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이자,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요. 하느님의 뜻이 예언되거나 드러나는 장소 역시 꿈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37,3)

이스라엘(야곱)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기에 다른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고 전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요셉이 늦둥이기에 그만을 더 사랑하였을까요? 사실 이는 요셉의 어머니가 누구인지와 더 관련이 있을 겁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이 너무나 사랑했던 여인 라헬에게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 보게 된 아들, 즉, 라헬의 첫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열 한번째 아들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요셉이야 말로 참 아들이자, 자신의 대를 이을 상속자였을겁니다. (1역대기 5,1-2) 이미 이스라엘 스스로도 장자가 아님에도 이사악을 이어 대를 이었지요. 요셉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은 이미 에사우와의 역사적인 만남을 앞두고 두 여종과 그들의 아이들을 맨 앞에, 레아와 그의 아이들을 그 뒤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헬과 요셉을 위치시킨데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누구를 가장 사랑하고 누구만은 꼭 지키고 싶어하는 지를 드러냈던 것이지요. 단순한 편애를 넘어서서 상속의 문제까지 연결이 된다면 이는 사실 다른 형제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또 그가 사랑한 아내 라헬은 벤야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을 더 이상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라헬을 만나고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5과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당대의 사고방식에 비추어보면 라헬의 삶은 이제 요셉과 벤야민을 통해 이어지게 됩니다. 이들을 통해 바로 라헬을 만날 수 있고 기억하게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요셉은 라헬의 첫째 아들일 뿐 아니라, 라헬을 쏙 빼 닮았었기에 요셉을 볼 때마다 라헬을 그릴 수 밖에 없었고 그를 더 편애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라헬은 몸매도 예쁘고 모습도 아름다웠다. (29,17)
요셉은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 (39,6)

여기서 몸매와 모습이 ‘예쁘다, 아름답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사실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יָפֶה) 입니다. 성서는 이를 통해서도 요셉에게서 라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셉에 대한 무한 사랑은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히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긴 저고리는 일반적으로 아마(리넨)로 제작 된 투니카(긴 겉옷)로 여러 색깔에 장식이 달린 옷으로 봅니다. 이는 당대에는 영광스럽고 장엄하게 보일 수 있는 옷이자 값비싼 옷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탈 28,40 레위 16,4 2사무 13,18) 다른 형제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옷을 오직 요셉만이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은 다른 형제들이 요셉에게 정답게 말을 건낼 수 없게 합니다. 이 ‘정답게’로 쓰인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샬롬’(שָׁלוֹם)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형제들이 요셉에게 평화롭게 말을 건낼 수 없음을, 형제들과 요셉 사이가 평화로울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느끼지 못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시선이 형제들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께서 각별히 사랑하는 아들에게 형제들이 눈에 띄는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제 ‘꿈’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꿈’에 대한 주제는 요셉 이야기에서 여섯 번 등장하게 되는데, 두 개의 꿈이 하나씩 쌍을 이뤄서 세 번에 걸친 꿈 이야기가 제시됩니다. 요셉이 꾼 두 번의 꿈은 앞으로의 요셉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표징을 담당합니다. 요셉 이전의 성조들의 삶에서는 하느님의 천사나 하느님께서 직접 나타났다면, 요셉에서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직접적 현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요셉에게는 이 꿈이 하느님께서 계시해주시는 유일한 부르심으로 제시되며, 이후의 그의 삶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마치 침묵하시는 것처럼 드러나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쳐 반복된 비슷한 꿈은 그 꿈이 반드시 실현되고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고, 요셉은 하느님으로부터의 미래를 약속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꿈을 통해 드러난 그의 삶의 미래적 표징은 앞으로 그의 삶의 여러 시련 속에서도, 그 시련을 이겨내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하느님안에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요셉이 꾼 꿈은 형제들의 곡식단들이 자신의 곡식단들에 큰 절을 하였다는 것이 첫번째고, 해와 달과 별 열 한 개가 자신에게 큰 절을 한다는 것이 두번째 였습니다. 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몽이 필요하지 않은 너무나 명확하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꿈이었지요. “네가 우리의 임금이라도 될 셈이냐? 네가 우리를 다스리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창 37, 8) 라는 형들의 이야기처럼, 이는 요셉이 장차 형제들을 다스리고 왕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형제들뿐만 아니라 부모 조차도 요셉에게 복종하게 됨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형들은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이를 얼마나 망쳐 놓을 수 있는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요셉이 얼마나 들떠서 자신의 꿈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고 떠벌리고 있는지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미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속에 당연히 자신의 미래가 그리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요셉의 모습에 형제들은 그를 더욱 시기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창 37,8. 11) 아버지 이스라엘은 요셉을 꾸짖기는 했지만,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 침묵의 받아들임은 후의 요셉의 삶의 여러 상황들 안에서 요셉의 침묵과 순명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됩니다.

아버지는 양떼를 돌보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좀 이상합니다. 형들은 스켐에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스켐은 바로 시메온과 레위가 디나에 대한 보복으로 그 성읍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던 곳입니다. (창 34,25) 그들의 복수로 가족 모두가 몰살당할 위협 (창34,30)이 상존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형제들이 양을 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전의 위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성서는 이에 대해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스켐이 양을 치기에 최적화 된 물과 목초지를 지닌 장소라는 사실과 이제 예전의 긴장 상태가 어느 정도 해소된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부터, 40여년간의 광야 생활을 함께했던 요셉의 유골을 안장한 곳도 스켐 (여호 24,32)이고, 요셉과 요셉의 후손들이 야곱의 상속자가 되어 그 재산으로 물려 받은 곳 역시 스켐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서 네 형들이 잘 있는지, 양들도 잘 있는지 보고 나에게 소식을 가져오너라.”(창 37,14)

아버지는 요셉을 보내며 형들과 양들이 잘 있는지를 보고 그 소식을 가져오라고 분부합니다. 이는 왜 요셉이 형들에 관한 나쁜 이야기를 아버지께 전해야 했는가에 대한 한 해답이 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양을 잘 치고 있는지, 양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고 하는 요셉의 사명의 수행은 모습은 융통성의 여부를 떠나 그가 아버지의 명에 충실한 아이임을 드러낸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형들과 양들을 잘 있는지에 쓰인 단어는 앞과 같은 ‘샬롬’(שָׁלוֹם)입니다. 이미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서는 정다울 수도, 평화로울 수도 없는데 이스라엘과 요셉만이 이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음에도, 아버지 이스라엘의 권위가 이를 무시해도 좋을만큼 훨씬 더 막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브론에 스켐까지는 어떠한 길을 선택하냐에 따라 다르지만 약 12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먼 길입니다. 그런데 이 장거리 도보 여행에 요셉이 어떤 차림으로 가는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긴 저고리(창 27,23)를 당당히 입고 이 여행을 떠납니다. 이 옷이 활동성이 좋거나 여행하기에 좋은 옷은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오직 자신만을 알고 아버지의 사랑에 푹 빠져 다른 형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요셉! 양을 치며 고생하던 형들이 이 옷을 입고 신나서 오고 있는 요셉을 멀리서 보고도 바로 알아보며 (창 27,18)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마냥 철없는 어린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아직 성장과 성숙이 필요했던 것이지, 근본부터 문제아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에 대한 책임감은 형제들을 찾아 스켐땅의 들판을 헤매이고, 형들이 도탄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아무 망설임 없이 형들을 찾아 떠나는 모습에서도 드러납니다.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형들을 찾아 5일여 길을 걸어 헤매이고, 또 하루 길을 걸어 헤매이면서도 형들을 만나고자 하는 요셉의 모습은 그의 성실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형들은 꿈쟁이 요셉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의 꿈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때 맏형 르우벤은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고, 피만은 흘리지 말자며 요셉을 살리려 합니다. 아버지의 소실을 범하며 아버지에게 치욕을 안겼던 르우벤(창 35,22)이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일까요? 사실 르우벤은 형제들의 맏이였습니다. 형제들을 이끌어가는 최종 책임자의 역할이 바로 그의 몫이었고, 무언가 일이 생겼을 때 형제들을 대표해 아버지 앞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도 역시 그의 몫이였습니다. 그가 비록 크나큰 실수를 했다고 할지라도, 다른 형제들이 분노와 화만 가득 해 살인을 저지르려 할 때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계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놓자고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편애의 결정적 상징과도 같았던 긴 저고리부터 벗겨 버리고 요셉을 구덩이 속에 던져 놓습니다. 이 깊은 구덩이는 우기 때의 물을 모아 우물처럼 사용하고, 건기에는 그 물이 말라버리는 곳으로 구덩이가 말라있다는 것은 이 시기가 건기임을 의미합니다. 이 구덩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보르(בּוֹר)인데, 이는 경호대장 집의 감옥을 지칭할 때(창 41,14)에도 똑같이 사용됩니다. 요셉 입장에서 보자면, 그의 삶에 있어서 두 번에 걸친 결정적인 구덩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건기의 구덩이에는 벌레들이 득실거렸다고 합니다. 형들의 돌변한 태도에 대한 당혹감과 도저히 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암흑 같은 구덩이에 홀로 갇혀 버린 요셉! 요셉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깊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끊임없이 울부짖지만(창 42,21), 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울부짖는 요셉을 곁에 두고 태연하게 앉아 식사를 합니다. (창 37,25) 같은 가족이라 할지라도, 시기와 질투가 분노로 변하게 되면 얼마나 잔인하게 변할 수 있는지를 형제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형제들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아버지였는데, 마치 어린아이들이 더 사랑을 받기 위해서 많은 사랑을 받는 어린이에게 해를 끼치는 것 처럼, 형제들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보상받기 위해서, 자신들이 더 사랑 받기 위해 요셉을 해치려 하고 있습니다. 가족간의 평화(샬롬)가 정답게 말을 건내는 것(샬롬)이 또 잘 있는 것(샬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사랑의 관점에서 되새겨 봅니다.

이제 이어지는 부분들은 사실 우리에게 좀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분명 형제들의 총 책임자는 르우벤 인데, 갑자기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해서 요셉을 살리기 위해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아무리 큰 빚을 졌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가족이나 형제를 팔 수 없는 것이 전통적인 법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이에 동의 합니다. 그런데 요셉을 구덩이에서 꺼내어 팔아넘기는 것은 형제들이 아니라 그곳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입니다.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끌어내어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지요. 그러면 이스마엘인들이 이집트에서 요셉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여기서는 또 미디안인들이 파라오의 내신이자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에게 요셉을 팝니다. (창 37,36) 다시 39장에서는 미디안인들이 아니라 이스마엘인들이 요셉을 판것으로 나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제 어느 정도 짐작이 가실 것 같습니다. 이는 두 전승이 합쳐져서 빚어진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훼계 전승(Y)은 유다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다윗 왕이 바로 유다 지파 출신이고, 제 2의 다윗인 메시아도 바로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후반부에서 실질적인 맏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유다(창 43,3;8 44:34)로 제시됩니다. 엘로힘계 전승(E)은 전통적인 장자의 역할을 따라 르우벤의 모습과 행동을 전하며 형제들의 책임자 르우벤을 제시합니다. 이스마엘 사람들(Y)과 미디안 사람들(E)은 서로 구분 되지만, 때로는 서로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으로 이 역시 전승에 따른 차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미디안 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깁니다. 은전 스무닢은 당시의 스무 살 이전의 노예의 값(레위 27, 5)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만약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외치고 있던 요셉을 미디안 인들이 구해주었더라면 창세기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하지만 이들은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이는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형제들을 찾아 나서던 요셉 역시 납치되거나 노예로 팔릴 위험을 안고 형들을 찾고 있었음을 되새겨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아버지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그 길을 걸어갔던 것이지요.
구덩이로 돌아온 르우벤은 요셉이 없어짐을 알아차립니다. 르우벤은 상을 당한 사람이 하는 일반적인 행동인 옷을 찢으며, 형제들에게 돌아가 외칩니다. “그 애가 없어졌다. 난, 나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요셉이 납치 된 것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맏이로서의 역할도 다시금 난관에 봉착합니다.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그에게도 역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다시금 “옷”의 주제가 등장합니다. 형제들은 긴 저고리를 찢어(창 37, 33) 숫염소의 피로 적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가져가서 그것이 요셉의 저고리라고 제시합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요셉을 자신의 형제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아들”의 저고리가 맞는지를 묻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형제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바라볼 수 있는 점은 이스라엘 자신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했던 것처럼, 아들 형제들 역시 아버지 이스라엘을 속이고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속이고 움켜쥐는 자였던 야곱(이스라엘)의 삶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지요. 자신이 했던 행동이 다시금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이제 요셉이 없어졌으니 자신들이 그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고 있었을까요? 야곱은 옷을 찢고 오랫동안 요셉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자신 역시 저승(셔올 :שְּׁאוֹל)으로 내려갈 것이라며 깊은 슬픔에 빠져 울고 있습니다.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것 처럼, 이 형제들에게도 그러한 사랑이 주어질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을 기억하고 현재화 해주었던 요셉을 잃은 이스라엘은 살아도 죽은것과 같고,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상태였을 겁니다.
38장 전체는 유다의 이야기로 구성됩니다. 내용의 전개나 구성의 자연스러움에 있어서 통일성을 깨는듯한 유다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었을 겁니다. 앞서 살핀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상속 권리는 요셉에게 있었지만, 유다에게서 영도자가 나게 됩니다. (1역대 5,2) 따라서 북 이스라엘에는 요셉의 후손 므나세와 에프라엠(창 41,51-52)에 대한 설명이, 남 유다에게는 페레츠에게서 시작된 다윗 가문의 유래(룻 4,18-22; 1역대 2,3-15)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유다는 레아의 아들로서 열두 아들 중에는 네 번째 아들에 해당됩니다. 유다는 가나안 여인을 만나 혼인을 하고 세 아들을 얻습니다. 에르, 오난, 셀라의 세 아들을 얻는데 첫째 아들인 에르가 타마르와 혼인하였으나 에르가 악하여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유대의 법에 따르면 혼인한 이가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의 형제가 그 과부와 혼인을 하고, 그렇게 낳은 아이를 고인의 아들로 간주하여 후손이 이어지게 하는 법(신명 25,5-6)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논쟁 (마태 22,23-33; 마르 12,18-27 ; 루카 20,27-40)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이는 이스라엘에는 익숙한 법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한 이 법은, 사실 여인 홀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운 유목사회에서 상대적 약자였던 과부를 보호하고 부양하기 위한 법이었으며, 또 그렇게 해서라도 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게 도와주는 당시에 있어서는 매우 인도주의적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난이 형수와 함께 살게 되는 것은 당연한 부분일진데, 오난의 입장에서는 형수와의 한 자리를 들어 얻게 된 자녀가 유다의 상속자가 되고, 자신과 후손의 상속의 몫이 줄어들 것이기에 이를 막고자 합니다. 이 역시 하느님 보시기에는 악한 행동이었기에 오난 역시 죽게 됩니다. 이제 유다의 입장에서는 세 아들 중에 두 아들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아들은 이제 셀라 밖에 없습니다. 유다가 당시의 법을 따라 셀라 마저 타마르와 혼인시키고 싶었을까요? 당연히 그러고 싶지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셀라마저 세상을 뜨면 자신은 대가 끊기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니 유다가 나름 수를 씁니다. 아직 셀라가 어리니 타마르는 본가로 돌아가 있으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이미 두 아들을 잃은 유다의 입장에서는 셀라가 타마르와 함께 살기를 원치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본가로 돌아간 타마르를 부양하거나 그녀의 삶을 배려했을리도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유다의 아내 역시 세상을 떠납니다. 이는 이제 유다에게는 오직 셀라만이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요, 더 이상의 다른 아들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애도 기간이 끝나고 시아버지가 양의 털을 깎으러 팀나로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타마르는 이제껏 입고 있었던 과부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길가에 나가 앉습니다. 다시금 ‘옷’의 이야기가 그 주제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우리가 야곱에서 보았던 것처럼, 양털을 깎는 일은 연중 가장 큰 축제의 시간이자, 기쁨의 시간입니다. 이 축제의 기간에, 그동안의 긴장들이 풀어지고 축제를 즐기는 시기에 타마르는 길가에 나가 있는 것이지요.
유다는 얼굴을 가리고 나와 있는 이 여인을 창녀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타마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냥 몸을 파는 여인으로 길에 나와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그녀를 신전 창녀(창 38,21)라고 생각합니다. 신전 창녀와 관계를 맺는 것은 고대의 관습으로는 그 신과의 통교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이 풍요의 축제에 신전 창녀와 관계를 맺는 것은 다산과 축복에 대한 감사와 지속적인 다산의 풍요로움을 청하는 행위가 되겠습니다. 이는 곧 가나안 신에 대한 예배 행위였고 이는 한분이신 하느님 앞에서 당연히 큰 죄가 되는 것이었지요. 유다는 당대의 관습에 따라 화대로 염소 한 마리를 주겠다고 하자, 타마르는 그 보증으로 인장과 줄과 지팡이를 요구합니다. 도장과 같은 인장과 줄과 지팡이는 다 그 사람의 권위와 신분을 나타내 주는 표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타마르는 유다의 아이를 갖게 되고, 그녀는 너울을 벗고 다시금 과부 옷을 입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담보물인 인장과 줄과 지팡이를 찾으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창피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기지요.
석달여가 흐르고 타마르가 임신을 알 수 있을 시간이 되자, 유다도 그 소식을 듣습니다. 유다는 법적으로 셀라와 혼인하게 되어있는 타마르가 간음을 했을뿐만 아니라 임신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를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게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불륜의 경우에는 돌로 쳐죽이는 것이 형벌이었는데(요한 8,5) 불륜의 경우 초기에는 화형에 처해지다가 점차 돌을 던져 죽이는 것으로 변화되는 형태를 띄게 됩니다. (레위 21,9 신명 22,23-24, 에제 16,38) 사실 레위기에 따르면 며느리와 동침한 경우에 둘은 함께 사형을 당하는 것이 법이기도 했습니다. (레위 20,12)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 애를 내 아들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 38,26)
사형을 당하러 끌려나온 타마르는 유다의 인장과 줄과 지팡이를 꺼냅니다.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를 돌보지 않았을뿐 아니라, 아들 셀라가 장성해도 타마르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전 창녀와 관계를 가지며 하느님을 거스리고서도 창피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는 자신의 인장과 줄과 지팡이를 보고, 자신의 후손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2사무엘 12,13), 자신의 과오를 곧바로 인정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의 인정과 고백, 이것이 성서가 초대하고 있는 하느님께로 돌아감이자 회개의 표시겠습니다. 성서는 타마르의 행동에 대해서 어떠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타마르의 행동은 유대 법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범죄이지만, 셀라가 어렵다면, 유다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가문과 혈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대를 잇고,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겠지요. 오히려 룻기에서는 타마르의 용기와 지혜를 칭송하는 모습 역시도 보여줍니다. (룻 4,12)
타마르가 해산을 할 때 야곱과 에사오의 출산 장면과 같은 모습이 또 한번 반복됩니다. 제라의 손이 먼저 나왔지만 곧이어 그 틈을 비집고 페레츠가 나옵니다. 이 형제들의 삶 역시도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다. 이 쌍둥이의 이름은 붉은 색의 뜻인 제라와 구멍, 틈의 뜻인 페레츠가 됩니다. 바로 다윗왕을 배출하게 되는 유다의 혈통 페레츠 가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9장은 다시금 요셉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39장 전체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주제는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창 39,2; 3; 5; 21; 23) 또한 요셉은 하느님의 현존 앞에 당신안에 충실한 신앙인으로 제시됩니다. 사실 자신의 형제들에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하고, 또 자유인에게서 노예가되는 엄청난 충격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한 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충격과 공포는 그의 삶의 많은 순간들에도 역시 상처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느님께서 주신 꿈에 우쭐대며 자신만을 생각하던 요셉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록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이는 삶의 환경이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고백하며, 충실히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요셉입니다. 17살 철부지 요셉이 이제는 어엿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셔서 노예 신분임에도 그의 모든 일들을 잘 이루어 주십니다. 그의 주인 포티파르 역시도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그의 손을 통하여 잘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요셉이 있는 곳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 땅이 아닙니다. 이집트 땅에는 이집트 신이 있고, 그 신이 지배하는 지역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신을 뛰어 넘으신 분이시지요. 이집트 안에서도 당신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시고, 이를 포티파르 역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종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재산관리인이 됩니다. 그의 삶에도 드디어 빛이 조금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어머니 라헬을 쏙 빼 닮았기에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운 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도 잠시 요셉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칩니다. 매력적인 요셉을 주인의 아내가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은“나와 함께 자요!”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 원문은 이를 명령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즉, “내 옆에 누워라!”가 되는 것이지요. 요셉이 재산을 관리하는 막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는 해도 한낱 노예일 따름입니다. 주인 마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는 없어 보입니다. 이 명령의 거역만으로도 그의 목숨은 위태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두 가지 이유를 들며 이를 거부합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는 주인과의 신뢰를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이며, 두번째 이유는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삶 안에서 얼마나 강력하게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살았으며, 하느님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려 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고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설사 위협이 가해진다 할지라도, 자신은 하느님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러한 죄를 지을 수 없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이후로도 여인은 날마다 요셉을 조릅니다. 요셉은 그의 곁에 눕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기회조차 피합니다. 유혹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피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 봅니다.
집안에 하인들이 아무도 없는 때, 요셉이 일을 보러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드디어 사단이 나고 맙니다. 부인은 또 함께 자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다시금 “옷”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붙잡힌 옷을 버려둔 채 밖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여인은 겁탈의 위험에서의 일반적인 방어 방법이었던 소리를 지르며, 하인들 앞에 이 옷을 증거로 내보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여인이 이러한 일의 원인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희롱하라고 주인께서 저 히브리 녀석을 데려다 놓으셨구나.”라는 표현은 그녀 뿐만 아니라 종들 모두가 희롱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경멸해서 부르는 표현인 ‘히브리 녀석’이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에게 경멸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종들이 없이 남편과 함께 있을 때에는 ‘히브리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 역시 요셉을 비하합니다. 여기서도 “당신이 데려다 놓으신 저 히브리 종”이 문제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서도 보았던 바와 같이 이제 모든 문제는 주인에게 있었던 것이 됩니다. 저 “히브리” 사람을 데려다 놓은 주인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가 입고 있던 옷은 그를 강간범으로 몰아버릴 결정적 증거가 되고 맙니다. 자신의 노력과 환심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요셉에게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버린 주인마님에게 요셉이 살아날 구멍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요셉은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침묵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 같은 요셉의 모습입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은 포티파르는 요셉을 감옥에 처넣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 합니다. 그의 침묵과 더불어 그의 삶은 다시금 한번 더 구덩이(감옥)로 빠져 들었습니다.
사실 종이 주인 마님을 범하려 하였으니 그의 목숨은 당장에 끊겨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아내도 포티파르도 아무 말 없이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사실 파라오의 내신(창 39,1)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내시’라는 뜻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번역본인70인 역은 아예 ‘내시(εὐνοῦχος)’로 명시 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여인의 반복되는 유혹에서 벗어날 방법은 요셉에게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10여년을 넘게 요셉을 보아왔고, 또 자신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길만큼 신뢰가 두터웠던 포티파르가 아내의 말대로 요셉의 행동을 고지 곧대로 받아들였다면 그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보면, 아내의 화는 당연히 남편에게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포티파르 역시 앞의 증거들 앞에 더 이상은 요셉을 보호해 줄 수 없기에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더군다나 이 감옥은 경호대장의 집 안에 있는 감옥(창 40, 3)으로 일반 죄수들이 아니라 파라오의 죄수들, 즉, 고관들이 갇히는 감옥으로서 포티파르의 마지막 숨은 배려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감옥에서 살게 됩니다.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노예 신분이었지만, 성실성을 인정받아 이제 조금 그의 삶에 빛이 드는가 했더니 다시금 어둠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억울함과 분노와 화를 어찌 해야 할까요? 무기수로서의 앞으로의 삶은 어찌 또 살아가야 할까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감옥에의 삶에서도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는 감옥의 우두머리인 전옥의 눈에 들게 되지요. 사실 이 감옥이 경호대장의 집 안에 있는 감옥이기에, 이미 전옥 역시도 요셉의 배려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무기수 노예에게 전옥이 자비를 베풀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를 성서에서 주님께서 함께 계셨기에 가능한 은총으로 표현합니다. 마치 요셉이 처음 포티파르의 집에 왔을 때와 같은 상황이 한번 더 반복됩니다. 전옥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모든 일을 요셉이 처리하게 합니다.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기에,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는 잘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시지만, 그 방식과 때는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심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 함께 하시기를 청하기 때문에 당신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주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은총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당신께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주님 탓의 경향을 우리는 삶의 순간에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당신께 청할 수 있는 믿음이, 신앙이 필요하겠지요.
중요한 부분은 요셉은 그 자신의 일이 잘 되거나, 잘 되지 않았을 때나 하느님의 현존 의식 속에서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이 순간들에 당신께서 함께 해 주시며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비록 무기수의 삶이었지만,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축복해 주십니다. 요셉은 그의 삶의 방향이 어찌 흘러갈지 알 수 없었고, 그 어떤 희망을 가지기에도 어려운 고통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하느님 안에 충실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40장에서는 파라오의 두 대신 곧 헌작 시종장과 제빵 시종장이 진노를 사서 갇히게 됩니다. 헌작 시종장은 파라오에게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으로서, 단순히 술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술에 독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종장이며, 제빵 시종장은 파라오의 음식 전반을 책임지는 시종장입니다. 음식에 독을 타는 독살의 방법이 횡횡했던 시기에, 이들이 맡고 있는 역할은 결코 작은 역할 일 수 없었으며, 파라오의 신임을 얻는 고관들이어야 가능한 직책이었습니다. 이에 경호대장은 믿음직한 요셉을 시켜 그들을 시중들게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두 시종장의 얼굴이 언짢습니다. 이들이 꿈을 꾸었는데 풀이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두번째 꿈이 등장합니다. 여기서도 두 가지 꿈이 한 쌍을 이루며 대비되는 꿈의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꿈을 해몽하고 해석하는 것은 전문적인 일이었으며, 이들이 왕궁에 있을 때에는 해몽가에게 쉽게 문의할 수 있었으나, 감옥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꿈이 자신들의 미래를 예고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이들의 얼굴은 언짢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은 이런 전반적인 상황에 화두를 던집니다.
"꿈풀이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창 40,8)
그는 무기수로 감옥에 있지만, 하느님을 향한 그의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요셉이 꿈풀이를 해 줄수는 있지만, 그는 이집트의 현자나 마술사들과는 다릅니다. 태양신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그 꿈 풀이를 하실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꿈에 도취되어 자신밖에 모르던 어린 요셉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했는지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요셉은 헌작 시종장의 꿈을 풀이해주며, 그가 복직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며 자신을 기억해 줄 것을 청합니다. 파라오께 사정을 아뢰서, 자신이 풀려 나게 해 주기를 빕니다. 그가 히브리인들의 땅에서 붙들려 왔으며, 이런 구덩이에 들어올 일은 아무것도 한적이 없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실로 요셉은 구덩이에서 붙들려 왔고(창 37,28), 이런 구덩이(감옥)에 들어올 일은 아무것도 한 적이 없기에, 그의 소명은 참됩니다. 하지만 시종장이 고관이라 할지라도, 한낱 무기수 노예의 자유를 위해서 파라오에게 이를 아뢰서, 자신이 풀려나게 해 주기를 바란다는 말은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아직 그에게는 지혜와 식별의 성숙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요? 요셉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답답한 무기수 생활을 언제나 끝낼 수 있을까요?
제빵 시종장의 두번째 꿈은 흉몽입니다. 그는 사흘뒤에 나무에 매달려 죽을 것이고 또 실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있는 그대로 그 꿈을 설명합니다. 이는 요셉의 해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그의 의견이 개재될 틈은 없어 보입니다. 헌작 시종장은 꿈의 해몽대로 복직되었으나, 요셉의 간청처럼 요셉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는 요셉을 잊어 버립니다. 그는 한낱 무기수 노예 였을 뿐이었으니 말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헌작 시종장의 복직 소식에 자신의 자유를 꿈꾸며 기대에 부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무기수로서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은 아직도 2년이 넘게 남아있었습니다. 언제일지 모를 불확실한 2년이 넘는 기간을 지내면서도 요셉은 하느님안에 충실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매정하시게도 침묵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세 번째 꿈이 41장에 제시됩니다. 바로 파라오가 꿈을 꾸게 되는 것이지요. 요셉이야기에서 나오는 꿈의 구조를 볼 때, 독자들은 파라오의 꿈 이야기 역시 두 가지 꿈이 대조를 이루며 제시될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파라오는 신의 아들로서 신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즉, 파라오가 꿈을 꾸었다는 것은 신이 꿈을 통해 미래를 계시해 준 것이 됩니다. 파라오의 꿈 이야기는 다니엘서(다니 2,1-49)의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꿈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의 꿈이 어떠한 의미가 있고,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다니엘서는 많은 도움이 될 정보들을 안겨줍니다.
파라오가 두 번에 걸쳐 꾼 꿈은 비슷한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살찐 암소 일곱 마리가 못생기고 야윈 암소 일곱 마리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첫 번째 꿈이고, 두 번째 꿈은 좋은 이삭 일곱이 야위고 샛바람에 바싹 마른 일곱 이삭들에 삼켜지는 꿈입니다. 마음이 불안한 파라오는 이집트의 모든 요술사와 현인들을 부르지만, 아무도 이 엄청난 꿈을 풀이하지 못합니다. 이 꿈의 해몽은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중대한 사안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꿈을 풀이할 해몽가가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헌작 시종장이 요셉을 기억해 냅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오늘에야 제 잘못이 생각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요셉은 한낱 무기수 종이었기에, 요셉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는 경호대장의 종인 젊은 히브리인으로 그를 기억합니다. 허나 그가 풀이한 대로 꿈이 이루어졌음을 파라오에게 이야기 합니다. 파라오는 요셉을 당장 불러오게 하고, 요셉은 다시금 구덩이(감옥)에서 올라오게 됩니다. 그는 이집트 남자들 처럼 수염을 깎고, 새로운 옷을 입고 파라오를 만납니다. “너는 꿈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그것을 풀이한다고 들었다.” (창 41,15) 파라오에게 요셉은 꿈을 잘 풀이하는 해몽가로 여겨집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만, 하느님께서 파라오께 상서로운 대답을 주실 것입니다.”(창 41,16)
기약 없고 희망을 찾을 수 없는 2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왔던 요셉이 파라오에게 던지는 첫 답변입니다. 그가 지난 2년여를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 고난과 고통속에서도 어떻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집트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국가입니다. 시종장에게 까지야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이 이해될 수 있다 할지라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라오 앞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로도 그의 목숨은 위태로울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요셉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는 겸손하고도 단호하게 꿈을 내려주시는 분도 풀이해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요, 이집트 땅에서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시고 이끌어가시는 분도 하느님이심을 밝힙니다. 2년간의 감옥생활이 그에게 원망과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살아왔음을 밝히는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이집트의 전문가들 그 누구도 풀지 못한 꿈을 한낱 히브리 무기수 노예에다 ‘하느님’이라는 다른 신을 믿는 다고 고백하는 이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는 파라오의 침착하고도 지혜로운 식별의 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다. 요셉은 꿈을 통해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를 파라오에게 설명 합니다. 앞으로 일곱해의 대풍이 있고, 이어 일곱해 동안의 대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꿈의 내용입니다. 두번에 걸친 꿈은, 요셉의 꿈에서와 같이 반드시 이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표징이 될 것이며,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기에 완전한 축복이나 저주를 의미할 것입니다. 암소와 밀 이삭은 목축과 농경의 이집트 사회를 의미하고, 샛바람(탈 10,13; 시편 48,8; 호세 13,15; 요나 4,8)은 당시 동쪽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으로 이 바람이 불어오면 곡식이 말라버리고 흉년이 들었기에, 이는 이집트의 해몽가들의 눈에도 합리적인 설명이었을 것입니다. 또 7년 정도의 풍년이나 기근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집트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수긍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요. 요셉은 꿈 해몽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대비책과 해결책까지 제시합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을 하나 세워서 앞으로의 십 사년을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대풍이 드는 일곱 해 동안은 수확의 오분의 일을 받아 흉년을 대비하고, 성읍들에 곡식 창고를 만들고 이를 비축 양식으로 남겨 두는 것이 바로 요셉의 대비책입니다. 앞의 시종장에게 희망을 걸며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변화와 성장의 요셉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파라오마저 탄복하게 만듭니다.
“이 사람처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을 우리가 또 찾을 수 있겠소?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주셨으니, 그대처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또 있을 수 없소. 내 집을 그대 손 아래 두겠소.” (창41,38-40)
파라오는 하느님의 영을 지닌 요셉을 알아보고 그를 인정합니다. 그가 얼마나 결단력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는가는 이후의 요셉에게 하는 행동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낱 히브리인 무기수 노예였던 이가 꿈풀이를 했다고 해서, 이집트의 고관들과 백성들이 요셉의 명령을 쉽게 들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는 이집트 온 땅을 요셉의 손 아래에 둔 다며, 자신의 손에 있던 파라오의 인장 반지를 바로 요셉의 손에 끼워 줍니다. 권위를 상징하는 값비싼 아마 옷을 입히고, 목에는 직접 금 목걸이를 걸어 주며, 파라오 다음으로 그를 병거에 태워 사람들을 무릎 꿇게 합니다. 파라오의 말이 곧 법인 시대에 절대 권력을 요셉에게 주는 것이지요. ‘차프낫 파네아라’ (비밀을 보여주는 이, 계시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라는 이집트 이름을 주어 이집트의 새로운 사람임을 밝힘과 동시에, 태양신의 제의적 중심지인 온의 사제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주어, 가문과 영향력에서도 그 누구도 요셉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어 줍니다.
이때의 요셉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열일곱의 철부지 아이가 그 어느 누구도 겪을 수 없는 십 삼년의 혹독한 단련의 시기를 거쳐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가지고 소유할 수 있는 요셉, 그가 그토록 희망했던 하느님의 이끄심은 그가 상상하거나 꿈꿔 왔던 계획을 뛰어넘는 엄청난 움직임이셨습니다. 이제 요셉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 힘을 이용해서 포티파르나 그의 부인, 또 시종장에게 복수를 하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삶에서 처음으로 가져본 따뜻한 가정과 신혼의 단꿈에 취해 있었을까요? 요셉은 이제 더 이상 열일곱 어린아이 요셉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신혼의 단꿈을 만끽하기 보다 이집트 온 땅을 두루 돌아다니며, 현장 시찰을 합니다. 대풍이 든 일곱 해 동안도 모든 양식을 거두어 성읍에 저장하며 성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에 임합니다.
마지막 대풍의 일곱번째 해, 요셉은 두 아들을 얻습니다. 태양신의 사제 집안에서 모든 권력과 명예를 획득한 요셉에게 7년간의 안락한 생활은 하느님을 잠시나마 잊게 하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고생과 내 아버지의 집안조차 모두 잊게 해 주셨구나.”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나쎄라 하고 “하느님께서 내 고난의 땅에서 나에게 자식을 낳게 해 주셨구나.” 하며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프라임이라고 합니다. 7년간의 대풍년과 더불어 풍요가 있었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고생과 아버지의 집안 조차 모두 잊게 해 주셨다는 맏아들의 이름의 의미는 반대로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침묵중에 그 고통들을 당신께 의지하며 걸어오고 그리워 했었는가를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둘째 아이를 통해서는 이제 고난의 땅에서 자식을, 그 풍요를 가져다 주셨음을 감사하는 요셉의 마음을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7년의 대 기근이 시작되어도 이집트는 안전합니다. 잘 보존해 왔던 곡식 창고를 열어 이집트 사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요셉은 현자의 표징이 됩니다. 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므로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외치며 단호히 유혹에서 멀어지던 요셉은 이제 성숙과 성장을 거쳐,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2015-10-05 11:54:43 from 106.251.4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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