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과 야곱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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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과 야곱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31,1-36,43)

주님께서는 이제 고향 땅을 처음 떠나올 때 베텔에서 하셨던 그 약속을 실현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자신을 직접 드러내셔서 표현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천사’라는 표현을 통해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라반의 속임수와 계략 속에서도 야곱과 함께 하시며,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현실적 축복의 표징으로 이제 부자가 된 야곱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30장이 하느님의 축복 보다는 야곱의 현명한 처신으로 인해 부자가 되었음을 강조 한다면, 31장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이 축복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축복의 연장으로 고향 땅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이 없었다 할지라도, 야곱이 이전과 같이 살아가기에는 어려운 여러 다른 분위기들이 감지되기 시작합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그 이름의 뜻처럼 라반의 것을 가로채고 빼내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수군거리고 있으며 (31,1), 야곱을 바라보는 라반의 눈도 이전 같지 않습니다. 야곱의 부인들이 보기에도 자신들의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야곱은 부인들을 때문에 14년을 헌신하며 일했지만, 라반은 당대의 관습상으로 응당 지불했어야 할 지참금도 지불하지도 않았고, 이 마저 이미 다 써버린 것으로 묘사됩니다. (31,15)

참으로 오랜만에 라헬과 레아는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야곱의 결정에 동의를 표합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아버지에게서 거두신 재물은 자신들과 그 아들들의 것이라며,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하십시오.” (31,16)라고 화답합니다.

하느님의 명에 순명 하려는 야곱은 두 아내의 동의를 얻은 후, 식구들을 거느리고 재산을 모아 길르앗 산악 지방으로 주간도주를 합니다. 배경을 좀 살펴보면, 일단 라반의 양떼와 야곱의 양떼는 사흘거리(30,36)가 떨어져 있었고, 양털을 깎는 수확의 축제의 시기를 틈타 고향 땅을 향해 출발합니다.

여기에는 라반과 야곱간의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상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에게 양털을 깎는 일은 가장 큰 수확 축제 중 하나였고, 이는 몇 일간 이어지는 축복의 잔치였습니다. 이 축복의 잔치에 야곱과 그 부인들이 초대되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이들은 이 축제의 자리에 초대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라반이 자신의 딸들과 야곱의 가족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며 라반에게 있어서 사실 이들이 마치 이방인(31,15)과 마찬가지로 생각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분명 야곱 일가는 자신들의 정당한 재산을 챙겨서 떠나는 것이었지만, 탐욕스런 라반이 어떠한 보복 행동을 취할지 몰랐기에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라헬은 이때 라반의 집에 있던 수호신을 훔쳐 나옵니다. 결국 이 수호신이 라반이 라헬을 비롯한 야곱 가족을 뒤쫓는 명분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왜 하느님을 믿는 야곱 가족에게 수호신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라반의 가족은 아브라함과도 친척이며 또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안에 수호신을 모시고 있었다는 사실과 먼 길을 떠나면서 수호신을 훔쳐 나온다는 이야기는 라반의 가족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당대의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던 종교적 혼합주의의 영향 을 받고 있었고, 집안에 수호신 역시 함께 모시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라헬과 레아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야곱의 고향 땅으로의 여정을 수용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의 상태에 이르기에는 좀 더 시간이 더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베텔로 다시금 돌아가는 때가 되어서야 이들은 신상들과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35,2-4) 하느님의 뜻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야곱에게도 이는 같은 상황이지요. 야곱이 이방의 신을 모시고 있지는 않았지만 온전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 개개인의 신앙을 향한 여정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완벽한 신앙인, 완전한 신앙인이 아니지만 당신과의 만남과 체험 속에 성장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성조들의 삶에서도 역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의 가족들이 떠나간지 삼일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라반은 즉시 친족들을 소집하고 자그만치 600여 킬로미터의 길을 이레 동안 달려서 야곱의 가족들을 따라잡습니다. 도대체 라반은 무슨 생각으로 이들을 뒤쫓았을까요? 이제 분위기는 심상치 않습니다. 지난 20여년의 혹사와 같은 노동에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야곱과 가족들은 이제 심각한 위협에 놓이게 됩니다. 이 긴장감 넘치는 만남의 장면은 대체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절제절명의 위기의 순간!
바로 이 다급한 순간에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삶에서도 그들이 부당한 위협에 놓이거나 약자로서 겪어야 할 위협의 순간에 함께 하셨던 하느님!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이제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이 상황을 정리하시고 상대적 약자인 야곱의 가족을 보호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라반에게 야곱과 관련하여 시비를 가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야곱을 만난 라반!
라반은 하느님의 말씀을 염두하며 야곱에게 두 가지 점을 따집니다. 첫째는 자신의 딸들을 마치 포로처럼 끌고 도주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자신의 신상을 훔쳐갔다는 점입니다. 라반의 요구는 라반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지극히 합리적이고도 합당한 요구처럼 느껴집니다. 실지로 야곱은 라반을 속이고 몰래 달아났으며, 그로 인해 라반은 자신의 딸들과 손자들에게 입 맞춤 할 기회 조차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31,27-28)

이에 대해 야곱은 자신이 가졌던 두려움을 고백하며 도주에 대해서는 인정 하지만, 라헬이 신상을 훔쳤다는 사실은 몰랐기에 신상에 대한 질책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하며 대응합니다. 라반은 신상을 찾으려 온갖 애를 쓰지만 결국 찾지 못하지요. 이는 그 동안 라반에게 이용만 당하면서도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던 야곱의 울분에 쌓인 항변에 정당성을 안겨 줍니다.

십사 년은 어른의 두 딸을 얻으려고, 그리고 육 년은 어른의 가축을 얻으려고 일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장인어른께서는 저의 품값을 열 번이나 바꿔 치셨습니다. 제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두려우신 분께서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장인어른께서는 저를 틀림없이 빈손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저의 고통과 제 손의 고생을 보시고, 어젯밤에 시비를 가려 주신 것입니다.” (31,41-42)

적어도 20여년의 시간은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정직하게 살아왔던 야곱! 그 동안 속으로 삭이며 말 한번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억울함 즉, 열 번이나 품삯을 바꿔치기 했던 라반의 야비함을 그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며 정의로우신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불의한 상황 앞에 정의를 세워 주셨고, 자신을 위로해 주셨음을 강조 합니다.

야곱의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의 고백은 라헬의 안장 밑에 무력하게 깔려 있는 수호신의 모습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며, 함께 하시며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을 더 강조하며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라반은 하느님의 경고에 따라 야곱을 해치진 않았지만, 사실 그 자신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딸들과 자식들 또 그 가축들까지도 모두 다 자신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야곱과 라반은 더 이상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라반도 이미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라반은 야곱에게 상호간의 계약을 제안합니다.

당대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상호 불가침 조항과 같은 상호 조약을 통해 라반과 야곱은 서로가 서로에게 더 이상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자 합니다. 돌 기념 기둥과 돌무더기를 계약의 징표로 삼고 자신들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나호르’의 하느님 앞에 맹세를 하고 화해의 계약을 맺게 되는 것이지요.

지명에 관한 여러 명칭들이 한꺼번에 나오고 있는 이 부분은 조금은 혼란을 가져다 줍니다. 먼저 혼합된 여러 지명이 동시에 나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지명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중복된 전승들이 있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라반과 야곱의 고향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차이에서 발생됩니다. 라반은 ‘증거의 돌무더기들’을 가르키는 아람어 ‘여가르 사하두타’ 라 부르고, 야곱은 히브리말을 사용하여 ‘갈엣’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같은 연유로 이 산의 이름 역시 ‘갈엣’이 됩니다. 그뿐 아니라 이곳은 ‘미츠파’라고도 불리게 되지요. 같은 곳을 두고 세가지 지명이 함께 사용 되는 것인데 ‘미츠파’는 ‘망루, 관찰하는 탑’이라는 뜻으로 이 산에 있는 ‘돌 기념 기둥’과 연결 되어 주님께서 관찰자처럼 보아주시고 살펴 주시기를 바라는 뜻(31,49)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언어의 차이와 돌 기념기둥과 돌 무더기에 대한 용어가 함께 혼용되어 사용되며 다양한 지명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라반과 야곱의 계약은 단순히 상호 불가침의 보증 뿐 아니라 주님의 축복을 청하는 제사의 성격 역시 지니고 있습니다. 라반은 여기에 자신의 딸들의 미래를 보호하려는 성격 역시 포함시킵니다. 하느님께서 이 계약의 증인이 되실 것이며, 이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계약을 맺었다고 하더라도 라반과 야곱이 온전히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관계나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반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움직이심은 상호간에 적절한 거리를 만들어주었고 상호간 공생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제사를 지내고,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상호간의 음식 나눔, 즉, 식사를 함께 하며 밤을 지새고 이를 기념합니다. 이제 이 계약은 상호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축복의 징표가 될 것입니다. 라반과 헤어져 길을 떠난 야곱은 그 약속의 표징처럼 하느님의 천사들을 만납니다. 고향 땅을 떠나며 이곳이 바로 하느님의 집(베텔)임을 알았던 야곱은 다시금 고향 땅으로 돌아오며 이곳이 하느님의 진영(마하나임)임을 알게 됩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 현존의 깨달음의 또 다른 표현이겠습니다.

이제 드디어 야곱은 고향 땅으로 향합니다. 사실 그곳은 자신이 속였던 형 에사우를 피해 도망쳤던 땅이기도 했지요. 자신도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지만 자그마치 20여년을 떨어져 있었던 그 고향으로, 형의 분노에 찬 살기를 느끼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떠나야만 했던 그 곳으로 야곱은 다시금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즉, 야곱에게 고향으로의 귀환은 애타게 기다리던 시간이기도 했지만 두렵고도 어려운 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형이 앙심을 품고 분노에 가득 차 있다면 야곱과 가족들은 고향에서 몰살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장인과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한 숨을 돌리니, 사실 더 큰 어려움이 그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20 여년전에 하느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고, 이제 그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기에 야곱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하느님의 약속만 믿고 무턱대고 고향땅으로 돌아갈 야곱이 아니지요. 그는 먼저 자신의 심부름꾼들을 형에게 보내어 형의 마음을 떠보려 합니다. 아직까지도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자신을 “종”으로 철저히 낮추어 소개하게 하며, 20여년 동안의 지난 삶의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소와 나귀, 양과 염소, 남종과 여종들과 함께 돌아오고 있음을 밝히며, 야곱이 무언가에 실패하였거나 아버지의 유산 분배와 같은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려 오는 것이 아님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과거의 잘못에 대해 고백하며 에사우에게 호의를 청합니다.

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노심초사하는 야곱!
마침내 야곱에게 돌아온 심부름꾼들은 에사우가 장정 사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고 전합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분노와 살기에 가득찼던 에사우가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백명의 장정들을 대동하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고 들렸겠지요. 사실 에사우가 야곱의 재산을 빼았고 가족들을 몰살시킨다 할지라도, 20여년전의 상황들을 생각해본다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습니다. 속임수로 모든 축복을 다 가로챘던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의 분노가 이십 여년이 지났다고 해서 가라 앉을 거라 희망했던 야곱이 오히려 너무 순진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야곱은 바로 이 현실적인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형을 만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단 몰살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두 무리로 나누는 최소한의 방비를 한 후,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분명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바로 그 하느님께서 야곱을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고, 후손의 축복의 약속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은 축복의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도 절망적입니다. 그는 사실 일생 일대의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32:11)

야곱의 이 고백은 비록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죄와 부족함들을 고백하고 있지는 않지만, 고통중에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님께 온전히 호소하고 의탁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에게 과분한 자비와 선물을 내려주셨던 하느님 앞에서, 주님께서 주셨던 약속들을 다시금 기억하며, 애절한 마음으로 간청과 탄원을 드립니다. 진실한 기도 외에는, 그 간청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철저히 인식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야곱입니다.

이 간절한 기도를 마치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야곱은,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노력들 역시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준비를 잘 한다고 한들, 그 결과를 이루어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그는 형과 같이 잘 정비된 군사적 조직이 없습니다.

장정만도 400여명이 함께 움직이며 자신을 만나러 오고 있는 형과 자신의 가족들과 가축들을 돌보는 종들 밖에 없는 야곱!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의 방법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축들을 이용해서 어마어마한 선물들을 준비합니다. 이미 나누어 놓았던 두 그룹 앞에 염소와 양과 낙타와 소 그리고 나귀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차례 차례 거리를 두고 형 에사우에게 선물하고, 그 때마다 종 야곱이 주인이신 에사우에게 보내는 선물임을 끊임없이 이야기 하게 합니다. 조금이라도 형의 마음을 풀 수 있기를 희망하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이를 이전의 모습처럼 술수를 쓰고 속이는 야곱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여러 계획을 세우는 야곱의 모습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바에 최선을 다하는 야곱의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 입니다. 이는 에사우와의 만남의 장면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는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 그리고 자신에게 딸린 모든 것을 보낸 후 온전히 홀로 남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20여년만에 쌍둥이 형제의 만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야뽁강에서의 이 밤은 삶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는 밤이고, 자신이 그 동안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질 수도 있는 밤이기도 했습니다. 야곱이 홀로 남아 얼마나 큰 번뇌와 고민 속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을지 또 주님을 간절히 찾았을지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때가 되었으니 고향 땅으로 다시금 돌아가라고 하시며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간절히 느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간절함 속 고통의 상황은 그가 이전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이제는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야 하는 요청과 함께 하고 있음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빼앗는 자이자 속이는 자로서의 삶이 그를 고향 땅에서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면, 다시금 돌아오는 이 여정에서는 자신이 놓지 못하는 것들, 붙잡고만 있는 것들에 대해서 놓을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삶이 요청 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씨름 도중에 엉덩이 뼈를 다치게 되지요. 이제 더 이상은 큰 힘을 쓸 수는 없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버티는 것 뿐입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축복을 해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며 동이 틀 무렵까지도 막무가내로 버팁니다. 언뜻 보면 축복 중독자 같기도 하고 아직도 자신의 이름처럼 움켜 쥐는 자로서의 야곱의 모습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32, 28)

야곱의 대답은 자신의 이름을 답변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남을 속이고 움켜 쥐는 자입니다.’(27,36 참조)라는 고백이 되는 것이지요.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32,29)

야곱은 자신의 삶에서의 가장 큰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혔던 밤에 하느님을 만나고 이제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성조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새로운 이름을 받는 다는 것은 그 이름처럼 새로운 사람이 됨을, 새로운 삶을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하느님과 싸운 이’라는 이스라엘의 뜻 처럼 그는 하느님을 만나 뵈옵고도 살아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또한 이 이름의 또 다른 뜻처럼 앞으로 ‘그를 위해 싸워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야곱! 그는 이제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에만 쌓여 다른 이들을 속이고 움켜쥐는 이가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얼굴(프니: פְּנִי)을 서로 맞대고 하느님(엘: אֵ֑ל)을 뵈었는데도 목숨을 건졌기에 이 곳의 이름을 프니엘(פְּנִיאֵ֑ל)이라고 합니다. (32,31)

하느님께서는 다른 성조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지는 않으시지만 야곱에게 다시금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삶!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축복일 수 만은 없었습니다. 야곱은 다친 엉덩이뼈 때문에 이제 절룩 거리게 됩니다. 창세기는 이를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허벅지 힘줄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며, 허벅지 힘줄을 먹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통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을 이어갑니다.
하느님과 맞서는 야곱과 하느님과 만나는 야곱의 모습은 비단 야곱 혼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 삶에서도 역시 이런 순간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신의 부르심과 요청 앞에서 나 자신의 뜻만을 밝히며 주님과 씨름하는 우리의 모습 역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는 주님임을, 우리의 모습과 상황과 관계 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1, 14)

이제 드디어 야곱과 에사우 만남의 역사적인 순간이 도래합니다.
장정 사백명과 함께 다가오는 에사우! 다가오는 에사우 앞에 야곱은 두 여종과 그들의 아이들을 맨 앞에, 레아와 그의 아이들을 그 뒤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헬과 요셉을 위치시킵니다. 야곱이 가장 아끼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며 혹여 불상사가 일어나더라도 적어도 누구를 꼭 지키고 싶어하는 지를 알 수 있는 배치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야곱 자신은 절룩거리는 다리를 하고서도 자신의 자녀들보다 먼저 앞장서 갑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일곱 번 엎드려 절을 하며 형에게 다가가지요. 일곱 번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행해지던 예법으로 신하가 왕에게 극진한 예를 갖출 때 하던 행위입니다. 그가 이미 에사우 앞에 종들을 보내며 형을 주인으로 자신을 종으로 표현했던 그 언급들의 실제적 표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야곱을 본 에사우는 뛰어나와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두 형제간의 갈등, 그리고 형이 동생을 살해하려 하는 그 분노가 가득 찬 시기를 정점으로 야곱은 고향 땅을 떠나 20여년을 떨어져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이 기나긴 형제간의 갈등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리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에사우가 야곱에게 달려와서 그를 껴안았다. 에사우는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었다. 그들은 함께 울었다.”(33, 4)

사백명의 장정들과 함께 오던 에사우는 야곱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그를 껴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비굴하게까지 보이는 야곱과 보자마자 달려와서 껴안고 입을 맞추는 에사우의 모습은 극적인 상호 대비로 보여집니다. 이십여년 동안 이어졌던 이 형제들의 갈등은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두 형제의 감동적인 화해로 이어지게 된 것이지요. 동생과의 화해로 감동의 여운에 젖어있던 에사우는 그제서야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야곱의 뒤에 있던 여인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들이 누구냐고 묻는 것이지요. 야곱은 하느님께서 은혜로이 주신 아이들이라고 밝힙니다. 바로 지난 20여년의 생활이 자신의 집념에 의해 이루어진 고된 시간이었음에도, 은총과 축복 역시 함께 하고 있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프니엘)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33,10)

야곱은 에사우와의 만남을 하느님과의 만남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얼굴에서 이미 자신이 마주했던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는 에사우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표현임과 동시에 에사우의 용서가 결국은 하느님의 도움 때문이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형에게 용서를 받고 가족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도움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순간이기도 한 것이지요.
에사우를 칭하는 ‘주인’의 히브리 말(אֲדֹנִֽי 33,8)을 직역하면 일차적으로는 ‘나의 주인’을 뜻하지만 또한 ‘나의 주님’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이 이중적인 칭호를 통해서도 야곱이 이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체험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에사우는 이미 자신의 재산이 충분함을 이야기 하며, 야곱의 막대한 선물들을 사양하려 하지만 야곱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라며 꼭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야곱에게는 이전의 잘못들에 대한 용서를 의미하게 될 것이며, 이 두 형제간에 벌어진 증오와 살의의 시간에 대한 용서의 외적인 표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사우는 이 선물들을 받아들이며 20여년 만에 만난 아우와 세이르로 가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에사우의 용서와 형제애적 초대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러고 싶지가 않습니다. 몰살당한 위협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키고 형과도 극적인 화해를 했지만 아직도 그는 형을 두려워하고 있고 함께 살 수 있는 준비는 되지 않았습니다.

“주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약하고, 저는 또 새끼 딸린 양들과 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루만 몰아쳐도 짐승들이 모두 죽습니다. 그러니 주인께서는 이 종보다 앞서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세이르에 계시는 주인께 다다를 때까지, 앞에 가는 가축 떼의 걸음에 맞추고 아이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 (33,13-14)

야곱이 걱정되는 에사우는 자신의 호위병 중 일부를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동행시켜 주겠다고 하지만, 야곱은 이마저도 정중하게 거절합니다. 그제서야 에사우는 먼저 세이르를 향해 출발하지요. 먼저 형을 떠나 보낸 야곱은 세이르를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야뽁강을 건너가서 야뽁강 서북쪽에 집과 초막들을 지어 정착합니다.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리하여 이곳의 이름이 수꼿(초막)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삼대 축제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다른 말로 sukkot(סֻכּֽוֹת)이라고 하는데, 초막절 역시도 초막 안에서 축제를 지내기에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야곱은 파딴 아람을 거쳐 약속의 땅이라 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의 스켐 성읍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는 이 스켐 땅의 일부를 사서 제단을 세웁니다. 성조사에게 있어서 막펠라 동굴 이후에 두 번째로 성조들이 구입한 땅이 되겠습니다. 그는 이곳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칭하지요.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엘’이다라는 뜻의 제단을 세우고 정착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이제 자신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삶과 이름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제단을 세웠다는 뜻과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의 제단을 세웠다는 뜻 역시 가지게 됩니다.
또한 가나안의 바알신에게 바치는 중요 성소였던 스켐에 이 제단을 세웠다는 것은, 이제 이 성소가 하느님의 성소로 축성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봉헌될 것이라는 의미 역시 지니게 됩니다.

34장은 오랜만에 정착 생활을 하고 있는 야곱 가족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이제 성인이 된 디나가 그 고장 여인들을 보러 나갔다가 하모르의 아들 스켐에게 겁탈 당하고 맙니다. 아버지 야곱은 이 소식을 들었음에도 침묵합니다. 아들들이 가축들과 함께 들에 나가 있었으므로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전의 야곱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돌아온 야곱의 아들들은 화가 치밀어 올라 분개하며 복수의 때를 기다리지요.

일반적인 이스라엘 율법의 내용에 따르면 디나는 스켐의 아내가 되고, 스켐은 평생 디나를 내보낼 수 없다는 조건하에 혼인을 하고,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켈을 내는 것이 법(신명 22,29)이었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시대상황이었기에, 여성의 의견보다는 상대 남성과 딸의 아버지의 의도가 중요한 법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같은 민족들 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히위 사람 곧 가나안 지역의 이방민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법이었습니다.

스켐은 디나를 몹시 맘에 들어하며 혼인을 청해 옵니다. 야곱의 가족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달콤한 제안 역시 하지요. 즉, 디나와의 혼인을 허락하고 상호 부족간의 혼인을 맺는다면, 지역 어디든지 머무를 수 있다는 제안을 합니다. 자신의 땅이라고는 제단을 세우고 천막을 세울 장소밖에 없었던 야곱 가족에게는 정착할 수 있는 땅이 제공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부족과 부족의 결합으로 야곱의 가문과 히위 사람들은 한 겨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4,16)

이 제안 앞에 야곱은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스켐은 디나를 주기만 하면 야곱 가문의 어떤 요구들도 수용하겠다며 원하는 것들을 이야기 하라고 부추깁니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이미 벌어진 일 앞에서 자신의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판단하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누이의 수치에 분노하던 야곱의 아들들은 이 제안 앞에 거짓된 응답을 내어놓습니다. 즉, 야곱 가문의 특성상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과의 혼인은 수치스러운 일임을 밝히며, 히위 남자들 모두가 할례를 받는 조건하에서만 누이와의 혼인을 수용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누이를 데리고 떠나갈 것임을 강조하지요.

이에 스켐은 일말의 고민 없이 먼저 할례를 받고 그뿐 아니라 성읍의 모든 남자들을 설득합니다. 그가 비록 디나를 겁탈하기는 하였지만, 족장의 집안에서는 가장 존경 받는 젊은이였기에 그의 호소는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스켐은 상호간의 혼인 조약은 결국 야곱 가문의 재산과 짐승들이 모두 히위 사람들의 것이 될 수 있음을 근거로 이들을 설득합니다. 이 당시에도 경제 논리가 강한 호소력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 호소는 성읍의 사람들에게도 통하여 성읍의 모든 남자들은 다 같이 할례를 받게 됩니다.

사흘 뒤, 모두가 아파하고 있을 때, 시메온과 레위는 이 시간만을 기다리며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들은 칼을 들고 거침없이 성안으로 들어가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성읍을 약탈하고 양과 염소, 소와 당나귀, 재산들과 어린아이들과 아낙네들을 잡아와 버립니다. 한 성읍을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형적 약탈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27절에서는 야곱의 아들들의 약탈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시메온과 레위의 이후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두 가지 전승이 하나로 합쳐진 부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디나와 시메온과 레위는 모두 레아의 아들•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누이의 치욕 앞에 얼마나 분노했고 치를 떨었을지는 쉽게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분노 앞에서의 계략을 꾸미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가는 모습에서 아버지 야곱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시메온과 레위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이 두 형제를 나무랍니다. 집념에 따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삶이 바로 이 두 아들에게서도 똑같이 반복되었기에 또 이제 바로 야곱 일가에 대한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에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 위협을 얼마나 절실하고도 두렵게 느끼고 살아왔는지는 이 두 형제들을 저주하고 있는 유언에서 역설적으로 잘 나타납니다. (49,5-7)

“우리 누이가 창녀처럼 다루어져도 좋다는 말씀입니까?”(34,31)

야곱의 나무람 앞에 두 형제는 불의 앞에서의 정당한 외침처럼 자신들을 항변합니다. 또한 라헬의 자녀가 아닌 자신들을 홀대했던 야곱에 대한 항변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야곱 가족에게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의 복수의 위협 앞에서 두려워 떨며 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이제 이 땅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또다시 떠돌이 순례 생활을 해야 하는 야곱 가족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직 다른 민족과의 혼인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법적 규정들이 존재하는 시기는 아니나, 성조들의 다른 민족들과의 혼인에 대한 거부는 이민족과의 혼인을 통한 종교적 문화적 혼합 주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와 이스라엘 민족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복수의 위협에 스켐을 떠나야만 하는 야곱에게 하느님께서 새로운 목적지를 알려주십니다. 야곱에게 베텔로 올라가 그곳에서 살며 제단을 만들어 바치라고 말씀하시지요. 에사오의 살기 띤 분노를 피해 피신하며 하느님을 만났던 그곳, 그 어떤 장소 보다도 하느님과의 만남을 되새기며 살기에는 적합한 곳이 바로 베텔이겠지요. 이제 이 삶은 이전의 삶과는 또 다른 모습이 요구될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가족들에게 새로운 삶과 그에 합당한 준비들을 요구합니다.

“너희에게 있는 낯선 신들을 내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35,2)

라반에게서 떠나 올 때도 그랬지만, 야곱의 가족들은 아직 여러신들을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이방의 신들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낯선 신상들과 귀에 걸고 있던 주술적 귀걸이들을 모아 향엽 나무 밑에 묻어 버리지요. (35,4) 야곱은 어려움을 당할 때 응답해 주시고, 어디를 가던지 함께 계셔 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35,3)이라 고백 하며, 이제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의탁하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한 정화의 예식이 바로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게 되는 것이지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는 야곱! 하느님께서는 그를 보호해주시며, 주위의 성읍들이 아무도 야곱의 가족들을 뒤쫓지 못하게 하십니다. (35,5)

야곱은 가나안 땅 루즈 곧 베텔에 도착해서 이곳의 이름을 ‘엘 베텔’(베텔의 하느님)이라 다시 부릅니다. 베텔 자체가 ‘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번역을 하자면 ‘하느님 집의 하느님’ 정도가 될 수 있겠으나, ‘베텔의 하느님’ 이라는 표현을 통해 함께 하시며 보호해 주시는 주님을 강조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어 레베카의 유모인 드보라의 무덤이야기를 전하며 베텔의 참나무 밑에 있기에, 이곳의 이름이 알론 바쿳(울음의 참 나무:אַלּ֥וֹן בָּכֽוּת)이 되었음을 설명합니다.

이어지는 9절에서 15절의 말씀들은 사실 조금 당혹 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금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을 주신다는 이야기와 자손번성과 후손에 대한 약속이 다시 나옵니다. 마치 앞의 반복처럼 이곳에 또다시 기념 기둥을 세우고, 이 장소의 이름을 다시금 ‘베텔’이라고 명명 합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거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혼합된 중복 전승과 더불어 (어느 것이 옳은것인지를 구별하여 다른 전승을 빼는 것이 아니라 두 전승을 다 함께 경전에 포함시킴) 중요한 성소와 축복의 약속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어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라헬이 벤야민을 출산하고 죽음을 맞는 장면이 전해 집니다. 산고가 심했던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나의 고통의 아들:בֶּן־אוֹנִ֑י )라고 하였으나 아버지 야곱은 아이의 이름을 벤야민(오른손의 아들:בִנְיָמִֽין )이라 부릅니다. 창세기는 라헬의 무덤의 위치를 베틀레헴 근처의 ‘에프라타’라고 전하지만, 예레미야서에서도 확인되는 바처럼(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예레 31,15) 에프라타의 실지 위치는 라마 근처에 있습니다.

이어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중의 하나인 루우벤이 라헬의 몸종이자 자신의 소실인 빌하와 함께 동침하는 것을 알게 되는 치욕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장자였던 루우벤은 이로 인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며 아버지의 마지막 축복을 받지 못하게 되지요. (49,4) 열두 지파를 형성하게 되는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의 이름이 차례로 소개되는 족보 이야기와 이사악이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에사우와 함께 아버지를 막펠라 동굴에 안장하는 이야기로 35장의 내용은 마무리 됩니다.

36장은 에사우의 후손인 에돔의 족보와 임금들의 명단 그리고 족장들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에사우의 삶이나 그의 모습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창세기가, 한 장 전체를 할애해서 족보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이 족보의 내용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미 앞서 야곱과 에사우의 관계에서 살폈던 것처럼, 이스라엘과 에돔 민족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잦은 다툼과 갈등이 있었고 지배와 종속의 역사 역시 가지게 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과 에돔 민족은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지요. 야곱과 에사우가 서로 떨어져서 살기는 했지만, 세이르 산악지방에서 시작된 에사우의 후손들 즉, 에돔의 족보는 이스라엘과 에돔이 한 형제이자 민족이었음을 밝히며 상호 혈연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창세기에는 분명 중심 인물들이 있고 그 중심 인물들을 통한 성조들의 역사와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지만, 이스마엘의 예에서 처럼 하느님께서 다른 후손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들과도 함께 하시며 당신의 축복을 내리심을 바로 족보를 통해 전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바로 이 족보의 내용이 다산을 통해 민족을 이룬다는 축복의 내용이자 실증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에사우 족보를 끝으로 야곱과 에사우 형제를 중심으로 한 야곱 이야기는 마무리가 됩니다.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서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제가 나그네살이한 햇수는 백삼십 년입니다. 제가 산 햇수는 짧고 불행하였을 뿐 아니라 제 조상들이 나그네살이한 햇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47,9)

그는 자신의 삶을 짧고 불행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과 가장 가까워 보이는 야곱은 사실 장자권도 아버지의 축복도 사랑하는 여인도 많은 자식들과 부귀 영화도 모두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투신할 수 있는 능력과 끈기와 열정도 있었으며, 또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 이루어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움켜쥐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삶은 과정에 있어서 많은 고통들을 낳았고, 그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였다라고 까지 말하게 합니다.

이 고백은 반대로 하느님께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도록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시며 돌보셨는지를, 그 축복의 길로 초대하셨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마음으로 기다리시며 돌보시는 하느님, 깊은 사랑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앞에 잠시 머물러 봅니다.
2015-05-30 01:26:58 from 112.222.1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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