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득솔

보득솔은 낙락장송을 꿈을 안고 있는 작고 어린 소나무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청년성서모임이 펼치고 있는 주일 독서 복음 묵상 운동의 이름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날 수 있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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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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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4 주일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코린 13,2)
우리는 항상 자신의 삶을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을 위한 투자, 이웃 또는 교회를 위한 봉사, 자선,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통해 얻는 인간적인 기쁨?. 이런 것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채워줍니다. 이 모든 일들에는 사랑이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곧 사라져 버릴 물거품과 같은 것이 됩니다.
복 음 (루카 4,21-3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ㅇ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ㅇ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ㅇ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ㅇ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ㅇ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ㅇ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ㅇ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ㅇ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ㅇ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제 1 독서 (예레 1,4-5.17-19)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ㅇ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ㅇ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ㅇ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ㅇ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제 2 독서 (1코린 12,31-13,13 또는 13,4-13)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ㅇ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ㅇ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ㅇ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ㅇ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ㅇ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ㅇ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ㅇ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ㅇ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ㅇ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ㅇ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ㅇ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ㅇ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ㅇ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는 오늘 제 1독서의 말씀은 오직 유일한 참된 예언자이신 예수께로 연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 안에서 하느님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6,3)이 묘사하는 군중들의 첫 반응은 냉소와 거부였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 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구나 오늘 루카 복음이 전하는 군중들의 불신앙은 그에 대한 예수의 지적 이후에 분노로까지 치닫고 급기야는 들고 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의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기에 이릅니다.
☞ 도대체 그들의 불신앙과 분노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사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나를 당혹스럽게 했던 어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맺고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주저하는 예레미야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주 하느님의 그 힘찬 목소리라도 들은 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그 의연함과 당당함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때로 내가 당하는 몰이해와 비난, 어려움 등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 왔습니까?
오늘 제 2독서는 그 유명한 사도 바오로의 사랑의 찬가입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7-8절의 말씀처럼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가장 완벽한 하느님의 모습 자체입니다.
☞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가 가진 언변이나 지식, 모든 행위, 소유들이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씀에 잠시 머물러봅시다.
혹시 지금 나는 사랑보다도 더 귀중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 1,19)
자식이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돌보는 부모님처럼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와주신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께 어떤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조차 몰랐었고, 그저 살기에만 바빴던 것 같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커져 가는 속물적인 욕심,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어서 둘러대는 수많은 핑계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등을 하는 것이 그런 것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탓으로 돌려 버렸었다. 물론 하느님께 용서를 빌긴 했지만, 내 안에 있는 욕심과 불만의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고, 늘 마음속이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하느님께서 정말 구해 주셨다. 어느 날부터인지 말씀 하나 하나가 나의 마음속을 파고들었고, 나를 변화시켰다. 언제나 머리로만 알았지 마음으로부터는 되지 않던 일들,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나에게 가능해졌다. 까다로운 나를 가장 많이 겪은 동생의 입에서도 ‘언니, 정말 많이 변했어’라는 얘기가 나오고?. 나는 지금 나병을 고친 환자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불치병을 고쳤을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를.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 나를 구해 주신다는 것이 정말 다행스럽다. †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 1,19)
이번 연수기간에는 연수 봉사를 개인적인 사정으로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냉정하게(?) 연수 진행상황을 관찰할 수 있답니다. 요 얼마 전 창세기 파견미사 때였던가요? 미사 중 평화의 인사를 하기 전에 신부님께서 연수생들에게 뒤로 돌아서서 자신들의 그룹 봉사자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룹원 서로서로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먹서먹함과 약간의 낯설음이, 그룹공부를 하면서는 여러 가지 서로의 오해와 섭섭함들이, 또 자유를 억압 받는(?) 연수 안에서는 그들의 봉사자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그룹원들로 인하여 많은 상처를 받고 지친 그룹 봉사자들…. 하지만 신부님께서 평화의 인사 직전에 뒤를 돌아보라고 한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사랑밖에 없었습니다. 그룹원들을 보며 또 그룹 봉사자들을 보며 서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저 또한 가슴이 찡해오더군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어 우리를 구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인해 신부님이나 수녀님, 연수 봉사자들 그리고 연수생들도 건강하게 연수 안에서 사랑을 하는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이 드네요.
저 또한 연수를 못함으로 인해서 다른 방법으로 연수 안에서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코린 13.2)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요. 그것은 ‘사랑'의 달콤하고 행복한 순간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그렇게 행복하지도 그렇게 달콤하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큼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남녀의 연애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그동안의 관심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리고, 상대방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단지 ‘나'의 주장대로만 생각하고 행동하기만을 요구하는 모습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난 너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것도 이해 못해?', '날 좀 편하게 해줘!' 가까워진 연인사이 혹은 우리 가족들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은 없는지요? 왜 가까워지면 더욱 아껴주고 사랑하지 못하고 이렇게 이기적인 모습이 되어버리는 것일까요? 남들 앞에서는 상당히 친절하고 예의 바르면서 내 가족들에게는 거칠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코린토 전서 12장은 그러한 우리에게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줍니다. 말하기 쉽지만 행동하기는 어려운, 하지만 그러하기에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아무런 노력 없이 사랑을 받을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커다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항상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신을 버리는 노력도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
“그 때에는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코린 13,12)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얼마 전 연수 봉사를 마쳤습니다. 이제 2월이면 졸업을 하게 되서 연수 봉사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수를 마치고 센터로 돌아와 경당에서 기도를 하며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 이번 연수가 저에게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글쎄, 내가 앞으로 연수 봉사를 다시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기보다는, 이제 직장에 다니게 되어 성서모임에 함께 하지 못하면 하느님에 대한 저의 믿음이 이번 연수를 끝으로 약해져가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 이런 기도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부디 저의 신앙이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시작을 하여서 더 굳건히 될 수 있도록….
제가 온전히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에 대한 저의 믿음의 불씨를 새로 피워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
2013-01-30 18:44:03 from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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