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득솔

보득솔은 낙락장송을 꿈을 안고 있는 작고 어린 소나무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청년성서모임이 펼치고 있는 주일 독서 복음 묵상 운동의 이름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날 수 있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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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20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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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20주일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 12,3)
높은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를 목표로 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으뜸가는 사람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니요.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남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을 기쁘게 하며, 자기의 것을 내어 주는데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 우리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그것이 섬기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을 자식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방법이십니다.
복 음 (루카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ㅇ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ㅇ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ㅇ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ㅇ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제 1 독서 (예레 38,4-6.8-10)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이런 자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ㅇ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ㅇ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 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ㅇ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ㅇ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ㅇ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제 2 독서 (히브 12,1-4)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ㅇ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ㅇ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ㅇ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히브리서의 다음 구절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제 1독서가 전하고 있는 예레미야서 38장은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칼데아인들)에 포위된 몇 달간에 일어난 극적인 사건을 전해 주면서 모순의 상징, 반대 받은 표적으로서 예레미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바빌론 군대는 이집트 군대들을 맞아 싸우기 위해 포위를 풀고 일시적으로 철수를 했었는데 이것을 유다인들은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거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언자 예레미야는 거침없이 그들의 마음을 뒤집어놓았습니다. “너희는 칼데아인들이 너희에게서 물러갈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들은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너희를 공격하는 칼데아인들의 모든 군대를 너희가 쳐부수어 그들 가운데 부상당한 자들만 남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저마다 진지에서 일어나 이 도성을 불태울 것이다”(예레 37,9-10).
절망 상태에 빠져 있다가 이제 살았다고 환희에 차 있는 대다수의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는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백성의 사기를 꺾는, 적을 이롭게 하는 민족의 배반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들은 왕에게 그를 거슬려 격한 반감과 증오심으로 고발합니다. 예레미야는 급기야 자기 백성들로부터 대립과 불화의 원흉으로 지탄받고 생명까지 빼앗길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루카에 의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영광을 동시에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행 중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 신비의 완성을 철저히 준비시키시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이 지상에서 이루어야 할 사명의 깊은 의미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여기서 예수님께서 연결시켜 사용하고 계시는 불과 세례라는 상징적 표현은 분명히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시키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깊은 물속에 잠기는 침례적 행위로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드러내는 위대한 사랑과 철저한 가르침 앞에서 결단해야 할 것을 요구받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진정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고, 예민하게 만들어 고뇌와 갈등에 빠지게 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마음속에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거짓된 안정과 평온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빛과 어둠, 사랑과 이기심을 싸움 붙이러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때문에 한 가정 안에서도 식구끼리 서로 반대하여 갈라지는 일도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최소 기본 단위의 사회인 가정 안에서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때문에 선악이 대결하고, 옳고 그름이 대결하고, 인간 증오와 사랑이 대결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 믿음의 일치와 또한 그러한 믿음을 통한 그분과의 생활한 일치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영신적, 내적 평화를 건설하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이요 의무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오늘의 제 2독서는 이것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자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습니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오늘 성서 말씀도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나 혹은 교회 안에 특정 사도직과 봉사직을 이행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쉽고 타성에 젖기 쉬운 위선적 생활 태도를 훈계하는 내용들을 지적하면서 하느님 말씀의 본래적인 정신을 되새기고 겸손한 생활 자세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1독서에서 소개되는 말라기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새로운 국가 사회를 재건하던 시대에 활동하던 마지막 예언자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사제들이 하느님의 법과 계약이 지향하는 본질을 잃고 인간적 기준으로 전락된 것에 대해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느님 법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존엄성과 보편적 정의와 가치 기준을 무시한 채 사회적 차별을 야기시키고 공동체의 분열을 조장시킨 사제들의 태도를 책망합니다. “법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도리어 많은 사람을 넘어뜨렸다.” 하느님 법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인격적 신뢰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실할 때 그 공동체는 이미 죽은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라기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과 신뢰에 근거한 공동체 건설의 시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 12,3)
얼마 전 참으로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 며칠 밤을 지새운 정성이 칭찬은커녕 나 아닌 타인의 잘못으로 인하여 상사로부터의 심한 질책의 감수라는 결과로 돌아왔을 때 참담한 심정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질책에 대해서조차 좀처럼 참아내지 못하는 나는 오랫동안 불쾌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내가 이런 억울함을 당하게 한 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기까지 하였다. 그런 생각이 그들과의 자리를 거북하게 하였고, 한동안 그들을 피하게 하였다. 그런 나에게 오늘의 말씀은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의인을 위하여 희생할 사람들은 더욱 드물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분명 그 안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 문득 이런 질문들을 던져본다. 나는 자기를 변명하고 싶은 데도,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데도 침묵을 지킨 적이 있는가? 아무런 보상도 못 받고 남들은 오히려 나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데도 남을 용서하여 준 적이 있는가? 아무런 감사도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내적인 만족마저 못 느끼면서도 희생을 한 적이 있는가? 순명치 않으면 불쾌한 일을 당할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 느끼기에 순명한 적은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 어느 누군가도 나 모르는 사이에 나 때문에 희생을 감수해야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침묵 속의 희생이야말로 값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당연한 몫의 십자가일 것이다. †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히브 12,3)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이 안 맞는 동료, 선후배, 상사와의 마찰이 그 어느 막중한 업무보다도 더 큰 짐이 된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 손으론 소리가 날 수 없듯이, 그럴 리가 없는데도 나만 항상 당하는 것 같은 억울함과 서러움이 사람을 더욱 기운 빠지게 합니다. 게다가 한번 관계가 껄끄러워지면 어느 누가 먼저 굽히기 전엔 좋아지기 힘들다는 건 다 아실테죠. 물론 저도 알구요. 그런데 그 참고 굽히는 사람이 ‘나’일 수는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자존심이 사태를 더더욱 악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이유로 모욕과 고통과 죽음을 의연히 참아내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쌜쭉해져 있는 나는 과연 그런 예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까? 참아 받고 견디어 냄이 진정한 승리임을, ‘내가 먼저’ 다가섬이 참 사랑임을 이번 주 복음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히브 12,3)
후배 중에서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1년 정도 한 여자 후배가 있습니다. 그가 일하는 직장은 일의 특성상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후배는 처음 일을 시작하며 힘들지만 그 특이한 조직에 잘 적응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부쩍 힘들다고 하소연을 많이 합니다. 공정하지 못한 일 분배의 과정이라든지 심술궂은 선배의 험담에 매우 힘들어하였습니다. 사회생활이 얼마나 더 힘든 것인지를 설명해 주려다가 그런 훈계는 그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그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고 왔는데 자신의 처지가 그 중에서 가장 낫더라는, 그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해야겠더라는…. 성경 말씀을 읽고 우리의 생활을 바로 고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생활 안에서의 체험을 통해 그러한 것들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가 되기로 하신 예수님….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갖습니다. †
2008-06-12 23:55:59 from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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