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득솔

보득솔은 낙락장송을 꿈을 안고 있는 작고 어린 소나무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청년성서모임이 펼치고 있는 주일 독서 복음 묵상 운동의 이름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날 수 있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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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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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 14주일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갈라 6,15)
자신의 신앙생활에 점수를 매긴다면 여러분은 몇 점을 주겠습니까? 조금 부끄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런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타가 인정할 수 있을 만큼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의 외형적인 신앙새활을 인정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법칙에 따라 사는 새로운 생활을 강조하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음으로 해서 새로워진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복 음 (루카 10,1-12. 17-20 또는 10,1-9)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ㅇ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ㅇ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ㅇ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ㅇ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ㅇ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ㅇ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ㅇ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 ㅇ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말하여라. ㅇ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ㅇ'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ㅇ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ㅇ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ㅇ그러자 에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ㅇ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거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ㅇ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 1 독서 (이사 66,10-14ㄷ)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ㅇ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ㅇ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ㅇ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ㅇ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리라.
제 2 독서 (갈라 6,14-18)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ㅇ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ㅇ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ㅇ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ㅇ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크게 기뻐하여라. 오늘 말씀의 주제는 평화입니다. 히브리말로 평화는 샬롬(Shalom)이라고 표현됩니다. 샬롬은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유다인들에게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일상생활 안에서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단어였습니다. 단순히 전쟁이 끝났다거나 평온무사하다는 것보다는 훨씬 깊은 내용을 뜻하였습니다. 샬롬은 역경으로부터의 구원을 뜻하였고 건강과 아울러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을 의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통하여 주실 온갖 영적, 현실적 축복을 모두 의미하였습니다. 제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러한 평화의 의미를 너무나 인간적이고 시적인 황홀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는 모습입니다. 엄마의 풍요한 젖가슴에 안겨 흡족해 하는 아기, 입을 오물거리며 빨아먹는 달콤한 젖, 품에 안고 애무하는 엄마의 기쁨,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약속된 평화요, 기쁨입니다. 복음에서도 역시 질병을 치유하는 것과 악을 제어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파견을 받은 일흔두 제자들은 돈도 없고 무기도 없으며 아주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들을 해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마귀를 복종시키고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하느님의 평화는 바로 이 같은 힘을 가능케 합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때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시고자 평화와 기쁨의 전망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축원부터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평화의 큰 적은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자신이나 혹은 순전히 인간적인 도움이나 잔재주에만 미련스럽게 매달림으로써 평화를 거부하거나 상실하기 일쑤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마음을 활짝열고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의 품 안에 내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 2독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빌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오늘 시련을 당하고 슬픔에 잠겨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우리에게 보내주시는 평화의 표징을 깨닫고 응답송의 시편 66편을 힘차게 노래할 수 있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께서 하신 일들 얼마나 경외롭습니까!'" <평화의 인사> 그래도 전혀 마음이 편해지지 않고 평화가 나와 상관없는 낱선 단어로 느껴진다면 하느님께 평화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특히 미사 중 주님의 기도 다음에 오는 평화의 인사 시간에 진정 마음을 열고 기원합시다. "주님, 저희 죄를 보지 마시고 오직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화목하여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 6,14)
살다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 감정이 상하고 그 상황을 수습하려다 보면 먼저 누군가는 사과를 해야 합니다. 저는 요 근래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사과할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먼저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일단 제가 사과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는 좀 억울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왜 늘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생가면서, 내가 뭐 그리 죽을 죄를 지었나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또 주위 사람들은 가끔 저에게 충고를 하지요. 그렇게 먼저 굽히고 들어가 버릇하면 상대가 우습게 생각한다구요.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먼저 사과를 하면 분명히 그 관계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제 마음도 홀가분하구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엇인데, 내가 자랑할 것이 무엇인데,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오늘도 되도록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늘 제가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예수님을 본받아 제 자신을 아무 거리낌 없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갈라6,15)
백혈병으로 골수 이식을 한 지 1년이 되었지만 새로운 골수가 완전히 제 것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한동안 신체적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식편대 숙주반응이라고 하는데 저에게는 그것이 간으로 와서 또 한 차례 긴 입원을 하고 있습니다. 간과 황달 수치가 급속도로 뛰고 파도처럼 밀려드는 피로감에 거동하기가 참 부담스러워집니다. 눈은 샛노란 색이 되고 피부는 숯 검댕을 발라 놓은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검어집니다. 2-3일 두고 갑자기 높아진 간수치 때문이죠. 그런데 우스운 것은 이놈의 간이라는 놈입니다. 이놈이 민감할 때는 그물에 걸린 밴댕이만큼 민감하다가 둔해지기 시작하면 한 여름 그늘에서 낮잠을 자는 누렁 황소보다 둔해집니다. 그래서 수치가 치솟을 때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뛰다가 그것이 다시 회복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미약하리 만치 조금씩 수치가 내려가고 정상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 개월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도 이제야 간과 황달의 수치가 하향세로 돌아섰습니다. 입원 1달 만이지요. 이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이 놈의 간이 우리의 인간관계와 참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친분을 유지하다가도 사소한 오해와 괜한 자존심으로 등을 돌려버리기는 너무도 쉽지만 그러한 실수와 후회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부단한 노력과 긴 시간의 정성스러운 인간관계 회복이 필요합니다. 한 번 나빠지면 회복에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신체인 간과 비슷한 것이죠. 나에게 관계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 긴 병과 고통스런 시간에 실망하여 어느 사이엔가 마음을 닫아버린 나, 이것은 인간적 관계와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저의 일방적인 행동이었고 지금이라도 제 마음을 열면 그대로 저를 받아주시는 주님이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제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제 마음의 문 앞에서 애처로이 기다리고 계셨을 주님, 부끄러운 마음에 살며시 문을 엽니다. 주님이 살며시 저를 바라보시며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 분은 제 마음 속에 항상 함께 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조용히 '주 네 안에 들어가시려 하네'를 흥얼거려 봅니다.
2013-07-20 13:19:29 from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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