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득솔

보득솔은 낙락장송을 꿈을 안고 있는 작고 어린 소나무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청년성서모임이 펼치고 있는 주일 독서 복음 묵상 운동의 이름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날 수 있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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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3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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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 31주일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0)
“주님! 사랑합니다.” 버릇처럼 지껄여온 그동안의 고백을 주님은 어떻게 들어주셨을까요? 사랑한다는 말의 놀라운 힘을 체험하고서도 주님께 대한 마음은 형식적일 때가 많고, 급박한 상황이 되어서야 간절해지는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단 한 분뿐이신 하느님, 그분의 이름은 높여지고 찬양받으셔야 할 전능하신 이름입니다. 기도 중에 마음을 다 기울여 불러보십시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라고.
복 음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제 1 독서 (신명 6,2-6)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2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평생토록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3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
4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5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6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제 2 독서 (히브 7,23-28)
형제 여러분, 이전 계약의 23 사제들은 죽음 때문에 직무를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수가 많았습니다. 24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25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오늘 전례의 핵심 주제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구약과 신약을 요약하는 개념이며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절대 규범이기도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언급하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계명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절대적인 계명이요,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계명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개념도 아니며 구체적인 인간의 삶과 현실이 배제된 추상적인 의미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더불어 걸어왔던 삶과 구원의 결정체이고 신앙적 체험의 산물이며 하느님께 대한 충성 서약이기도 했습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삶의 이유이며 존재의 근거였습니다. 또한 모세는 이 계명이 지켜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그러한 내용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즉,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절대 명령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을 명령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어떻게 사랑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사랑이란 주고받는 나눔이요,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여지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하느님의 사랑만은 그 어느 것도 유보할 수 없는 배타적이며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제 1독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시고 완성시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기존의 율법 학자와는 달리 한 의로운 율법 학자의 입을 통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 주십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선상에 놓고 그 사랑의 충만함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조건적으로 실천해야 할 내용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당신 스스로를 바칠 수 있었기에 그분은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가 되었다고 제 2독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여라
우리 삶에서 아무리 나누고 이야기해도 끝이 없는 게 사랑에 대한 의미일 것입니다.
거멀못 가장 소중했고 잊혀질 수 없었던 사랑의 체험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 12,31)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잘 아는 성서구절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고, 나의 주변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욕심이 많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모르는 사람이 나의 경쟁자인 것 같은 생각이 항상 나의 머리 속을 맴돌고 시기와 질투로 힘들어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사랑을 주기보다 사랑 받기를 원하며 그것이 마음과 같이 안 되면 내 이웃에게, 내 주변사람에게 서운해 하기도 한다.
마음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그것이 마음같이 잘 안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일 것이다. 내 중심적으로 내 몸을 사려가며, 사랑하고 도와주고….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내 중심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생활하는 자녀로서 완벽하게 행하지는 못해도 노력하는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기특해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이나마 내가 노력하는 모습을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내 이웃을 위해 노력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간구해본다. †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신명 6,3)
세례를 받은 지 15년이나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의 생활은 교회와 아주 가까이 지내면서도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켜야 할 하느님의 계명을 내 상황에 따라 자신을 합리화시켜 가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번 그룹봉사자 재교육을 받는, 첫 봉사를 준비하고 있는 성서가족을 보며 그들의 열정과 순수함을 보았다. 몇 년 전 내가 말씀의 봉사를 시작하면서 재교육을 받을 때 신부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내게 커다란 용기가 되어 주었고, 그룹을 모집하면서 어렵고 힘들어도 열정은 사그러들지가 않았다. 봉사를 할 때 교육에서 들었던 대로 준비하고 그룹원들에게 아낌없는 관심과 봉사 중에 기도를 생활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봉사자로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열심히 살고자 했었다.
이젠 그런 현실이나 어려움들이 말로만 되풀이되고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반복되고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서인가 타성에 젖어가고 나의 준비와 상관없이 그룹공부는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느슨해지고 말로만 떠드는 봉사자가 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역시 어느 정도의 응용능력이 생겨 나름대로 알아듣고 스스로 그럴 것이라는 위로와 함께 만족해버리고 만다.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으로 성심껏, 그대로 실천하며 살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요즈음의 생활에 각성을 요구하시는 복음이었다. †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신명 6,4)
이전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그 사람과의 사랑은 다른 사람과는 차별을 갖는 어떻게 보면 배타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도 다른 사람보다 그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었고, 그 사람도 같은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만약에 배타적이라면 설령 그 사람과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 사람과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결코 배타적이지 않고 차별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것으로 저의 고민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때 생각을 하게 된 것이 그럼 하느님과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사람과의 사랑과는 또 다른 것일텐데…. 아마도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오늘 말씀에 담겨 있지 않나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하느님 당신 한 분뿐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하느님 사랑의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
2012-10-28 15:34:47 from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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