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득솔

보득솔은 낙락장송을 꿈을 안고 있는 작고 어린 소나무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청년성서모임이 펼치고 있는 주일 독서 복음 묵상 운동의 이름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날 수 있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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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성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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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성서 주간)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에제 34,15)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여 우리가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해 주는 방법은 우리 삶의 곳곳에 스며있지만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려면 주위를 둘러보아야 합니다.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주변에 더 추워하고, 더 외로워하는 이웃, 바로 그들이 주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양떼를 찾아보고 돌보아 주셨듯이 우리도 보잘 것 없는 이웃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복 음(마태 25,31-46)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ㅇ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ㅇ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ㅇ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ㅇ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ㅇ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ㅇ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ㅇ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ㅇ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ㅇ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ㅇ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ㅇ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ㅇ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ㅇ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ㅇ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ㅇ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제 1 독서(에제 34,11-12.15-17)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ㅇ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ㅇ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ㅇ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그러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 나는 이렇게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겠다.’ ㅇ너희 나의 양 떼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
제 2 독서(1코린 15,20-26.28)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ㅇ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ㅇ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ㅇ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ㅇ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ㅇ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ㅇ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ㅇ그러나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실천으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이룩하신 그리스도의 왕권
오늘 우리는 가해 전례력의 마지막 끝맺음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1년 동안 되새겨 왔던 모든 그리스도 신비의 결론으로 그리스도가 만물의 왕, 세상을 이기신 왕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 위에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심으로써 그분의 왕권이 진정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첫 번째로 자기 양떼를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시며 사랑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그분 왕권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사랑의 완전한 실천을 당신 나라의 왕권으로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제정된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완전한 사랑의 실천으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이룩하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기념하며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랑의 왕권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왕권, 진리의 왕권
예수께서는 이 사랑의 왕권을 수행하시기 위해 몸소 낮은 자로 오셔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한 죄 때문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6-37). 여기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진리의 왕권임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의 왕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왕다운 백성임을 명심합시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진리를 위하여 몸바치는 삶을 통하여 세상을 이겨내고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지난 1년을 돌아보며, 그간 관심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과 특별히 내가 돌볼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전화 통화와 만남으로 위로와 친교를 나눕시다.
“너희 나의 양 떼야” (에제 34,17)

“너는 내 꺼야”라는 말 자체에서, 그리고 그런 식의 애정관을 대하고 있노라면 ‘어디 너네 얼마나 가나 보자’라는 짓궂은 생각이 듭니다. 현실에선 어느 정도 가능한지 몰라도,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말 자체에 어패가 좀 있지요?) 서로를 성장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것 아닐까요? 제 주변에서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과 귀를 막고 서로만을 바라보라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매스컴에서도 현 세대의 풍속도를 반영한다는 미명하에 이런 왜곡된 사랑을 조장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구요.
글쎄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양(?)도 다르겠지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집착이 생기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하지만, 과연 인간이란 존재가 서로에 대한 정신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인지요. “너희 나의 양 떼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
2008-11-26 17:28:46 from 6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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