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득솔

보득솔은 낙락장송을 꿈을 안고 있는 작고 어린 소나무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청년성서모임이 펼치고 있는 주일 독서 복음 묵상 운동의 이름입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만날 수 있기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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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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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4주일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싸움. 거친 말들이 오고 가고, 좀 더 심해지면 손이 올라가고... 어렸을 때는 누구 하나가 울면 대개 그 싸움은 끝이 났지만 나이가 들수록 싸움의 끝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용서. 상대편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대가 없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형제의 드러난 모습에 얽매이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복 음(마태 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ㅇ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ㅇ“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ㅇ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ㅇ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ㅇ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ㅇ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ㅇ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ㅇ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ㅇ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ㅇ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ㅇ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ㅇ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ㅇ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ㅇ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제 1 독서(집회 27,30-28,7)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 ㅇ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엄격히 헤아리시리라. ㅇ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ㅇ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ㅇ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ㅇ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ㅇ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ㅇ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제 2 독서(로마 14,7-9)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ㅇ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ㅇ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용서받기 위해 먼저 용서하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기도는 언제나 기도의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의 일용할 양식,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하느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대부분은 하느님께서 자비롭게 하실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리의 행동이 선행되어야 할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저희 죄를 용서하시듯,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게 하소서’ 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뜻은 ‘용서받기 위해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저희가 용서하오니’ 구절이 마음 한 구석에서 걸리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깊은 상처와 거부하는 고집과 너도 당해보라는 보복 심리와 나는 잘했다는 자신감 등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기도 중에 유독 용서만이 우리의 행동을 먼저 요구하고 있음을 상기하며 오늘의 말씀을 들읍시다.
제 1독서는 복수심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 명심해야 될 교훈의 말씀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주님의 용서를 받으려거든 형제와 자매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단어를 바꾸어 가면서 다섯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 스스로가 먼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므로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분노와 진노, 복수와 화를 버리고 남의 잘못을 눈감아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할 때, 우리가 드리는 주님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유혹과 악에서 구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 - 너희가 마음으로부터용서하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서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불합리한 교훈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일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학대하는 내용은 이웃이 우리에게 빚진 것과 우리가 하느님께 빚진 것은 도저히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탈렌트의 약 60만 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미미한 액수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분에게 빚진 것을 용서해 주신다면 우리는 이웃이 우리에게 빚진 것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거의 비교할 수도 없이 미미한 것입니다. 용서받은 내가 먼저 사랑하여야 하고 그 사랑의 구체적인 첫 걸음은 타인에 대한 용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
바오로는 제 2독서인 로마서 14장에서 신자들의 여러 가지 행실을 평가하면서 신앙에 본질적인 아닌 한 서로 다른 행실에 대해서 상대방을 단죄하지 말 것은 물론 호의로 해석해 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니 모든 행실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맡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베푼 것처럼
1)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종의 모습과 견주어 자신의 용서에 대한 경험을 진실하게 나누어 보십시오.
너도 베풀어라
2) 당신은 자신과 생각이나 취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고 계십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마태 18,22)

성경에 나타나는 숫자는 고대 근동의 문화권 안에서 숫자가 어떻게 사용되었느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고대 셈족 문화권에서는 숫자의 본래적 기능 - 예를 들면 2는 1이 둘이 모여서 된 수치이며 사람이나 사물의 수효가 둘일 때 그 둘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 을 넘어서서 숫자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형용사적 의미로는 ‘꽤 많은 수, 최상급의 의미(창세 4,15 등)’를 가지기도 하고, 상징적으로는 ‘신성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거룩한 숫자이고 그 자체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베드로의 이 질문에는 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가 부각되고 있고, 사실 제자들도 이에 대해 그리 편협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무한정의 용서입니다. 또 바로 이어서 들려주시는 비유의 말씀에서 ‘용서’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의해 그 진실성이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선행과 용서를 통해 당신의 아버지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가 다시금 회복되기를 바라고 계신 듯합니다. †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집회 27,32)

남을 용서하는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임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는 듯합니다. 개개인에게는 나름의 가치관이 있듯이 저 역시 제 나름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물론 그 가치관의 가장 큰 중심은 신앙이지만,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판단할 때는 제 나름의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가치관이 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할 때가 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런 일들은 제 가치관의 기준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서만 그럴 때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 중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다소 고집스러울 수 있는 생각에 대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음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날 용서해주시듯이 나 역시 그러해야 하는데, 제가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제가 양보하지 않음을 볼 땐, 그분의 용서를 너무 요원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항상 그분은 제 이웃의 모습으로 다가오신다 하였기에 제 주위의 누군가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을 희생하며 날 용서해 주었으리라 생각하며 그분의 용서를, 이웃의 용서를 제가 다시 되풀이 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
2008-08-07 14:50:43 from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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